목록책과 영화와 연극 (62)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평판이 워낙 좋길래 뒤늦게나마 발품을 팔아 상영관까지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대원칙을 깨뜨릴만한 명작은 아니더군요. 물론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진 영화이긴 했지만, 제게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고 크게 느껴졌습니다. 혹자는 이처럼 동화같은 환타지를 표방하는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태도라고도 하더군요. 하지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기엔 지나치게 유치하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엔 걸맞지 않는 성인물의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일단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부터가 어린이 대상의 영화로는 적합치 않거니와, 지적장애인 이용구(류승룡)를 향한 경찰청장(조덕현)의 무차별적 폭력 장면이라든가, 심지어 "당신이 죽어야 딸이 산다"고 회유하는 변호사의 모습이라..
"길가에 버려진 넝쿨장미를 주웠다. 말라 비틀어진 줄기를 조심스레 옮겨 심고 말을 걸었다. '가엾은 것... 얼마나 아프니?'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조금씩 살아난 장미가... 어느날 환하게 웃었다." - 루터 버뱅크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넨다. 식물에게는 20가지가 넘는 지각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 루터 버뱅크 '식물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리는 미국의 식물학자 겸 원예개량가 루터 버뱅크( Luther Burbank )는 1849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몹시 가난했던 탓에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그래서 유전 원리에 대한 과학적 지..
로랑 로리니라는 시인은 삶의 병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지독한 병이라서 그 병을 앓는 사람은 사람을 보나 짐승을 보나 물건을 보나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음을 좀먹는 일종의 불안증이었다. 시인은 푸른 나무와 보리밭, 흐르는 물을 보기 위해 그가 살던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갔다. 그러나 샘물이 속삭이듯 지저귀는 메추라기의 노래, 베틀 소리, 바람에 윙윙거리는 전선 소리, 이 모든 것이 시인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더없이 감미로운 생각도 그에게는 쓰디쓴 것이었다. 이 고통스런 병에서 벗어나려고 예쁜 꽃을 꺾고 나서 그는 또 그 꽃을 꺾은 것을 슬퍼했다. 배꽃 향기가 은은한 어느 포근한 저녁, 시인은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흔히 책에 나..
기본적으로 영화는 남주인공 이승민(엄태웅)의 감정선을 따라 진행됩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련한 첫사랑을 추억하는 남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긴 여운을 되짚어 볼수록 이 영화의 초점은 오히려 객체로 표현된 여주인공 양서연(한가인)에게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분의 칼럼을 읽으니 남자의 기억 속에 첫사랑이 '여신'이면서 동시에 '쌍년'이기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의식적인 자기보호막 때문이라더군요. 아직 어렸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 미숙했던 시절, 세월이 흐른 후 돌이켜 보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만큼 못나고 찌질했던 시절의 자신을 차마 그대로 인정할 수 없기에, 잃어버린 첫사랑에 대한 책임은 온통 그 '쌍년'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거라고 말이죠. 어쩌면 영화 속 이승민은 남자들의 그러한 심리를..
원작을 읽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해를 품은 달'에서 뜨거운 맛을 본 이후, 절대 영화나 드라마를 (완전히 다) 보기 전에는 원작소설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현재 개봉 5일째인 영화 '가비'는 여러 면에서 김탁환의 원작소설 '노서아 가비'와 비교되며, 호평보다는 혹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흥행 성적도 예상보다는 저조하기 때문에, 조급한 사람들은 '화차'의 김민희와 '가비'의 김소연을 비교하며 두 여배우의 승패를 가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화차'라는 영화도 안 보았고 원작도 읽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저는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짧고 아쉽게만 느껴지더군요. 사실 저는 개봉하기 훨씬 전부터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하정우와 공효진의 이름을 믿고, 개봉하자마자 '러브픽션'을 보았습니다. 과연 하정우와 공효진의 후덜덜한 연기력이 이 영화를 살렸더군요. 그들이 아니라 다른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면 별로 가망이 없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영화 자체의 퀄리티는 높지 않습니다. 연애를 소재로 만든 영화들은 보통 고백하기 이전의 설레는 감정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되기까지의 풋풋한 시간들을 주로 다뤘다면, '러브픽션'은 연애의 시작에서부터 연애를 오래 지속한 커플들이 겪어 나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고 제작진 측에서는 주장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물론 영화가 아니라 가요이긴 하지만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발표된 시점이 1992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 전입니다. "저녁이 되면..
강동원, 고수 주연의 '초능력자'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명확히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인 듯 싶습니다만, 제게는 아주 괜찮은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하게 느껴진 것은 두 명의 주인공 중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특이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매우 신선합니다. *** 영화 리뷰에는 스포를 자제하려 노력하는데, 이번에는 쓰다 보니 스포가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1. 초인(강동원) 그는 어려서부터 눈빛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녔습니다. 자기 아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어머니는 그의 두 눈을 붕대로 가려 놓았지만, 초인은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소리를 듣고 분노를..
도대체 왜일까? 남들은 다 좋다는데 유독 내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 이 영화가 나는 원망스러웠다. 엄태웅, 이민정, 최다니엘, 박신혜, 네 명 모두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인데다가, 본 사람마다 좋았다고, 오랜만에 접하는 제대로 된 로맨틱코미디라고 칭찬이 자자하기에 꽤나 기대를 하고 본 영화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그렇고 지루한 멜로물일 뿐이었다. '광식이 동생 광태'는 정말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지난 4년 동안 감독의 스타일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감성이 달라진 것일까? 나의 취향에는 등장인물들도 그 연애의 설정도 하나같이 매력이 없었다. 연애를 도와주는 것도 정도껏이라야지, 자기 본연의 모습과 상관없이 너무 작위적으로 꾸며대면서 사랑을 시작한다는 설정부터가 별로 마..
관람하러 들어갈 때만 해도 은근히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자이긴 하지만 그리 겁이 많은 편은 아닌데다가, 공포영화 등에는 거의 무감각할 정도로 센 편입니다. 어차피 만들어진 영상이라는 것을 알고 보는 거니까요. 충격적일 만큼 잔인하고 끔찍하다는 소문을 벌써 귀에 못박히도록 듣고 갔지만, 속으로는 "잔인해봐야 그냥 영화지, 뭐" 이렇게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역시 겪어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예측하면 안 돼요. 생각지도 않은 충격이 처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국정원 요원인 김수현(이병헌)의 약혼녀 장주연은 눈 덮인 한적한 지방도로를 혼자서 차를 몰고 달리다가 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견인차를 불러 놓고 기다리는 동안, 김수현과 통화..
내 이름은 소미예요. 나는 11살이고, 나이트클럽에 춤을 추러 다니는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습니다. 아빠는 누구인지 몰라요. 가끔씩 엄마를 찾아오는 아저씨들 중에 내 아빠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엄마는 화를 내며 모른다고만 했어요. 아저씨들이 찾아오면 나는 무조건 밖에서 놀다 오라는 엄마한테서 쫓겨나 거리로 나왔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내 별명은 '쓰레기통'입니다. 뱃속에 내가 있을 때, 엄마는 화가 나서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가 발가락이 부러진 적이 있었대요. 그래서 내 별명이 쓰레기통이 되었다는데, 아이들은 모두 내가 더러워서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아무도 내 곁에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아요. 엄마는 가끔 팔목에 주사바늘을 꽂고 누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어요. 그게 뭔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