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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승민은 정말 서연을 사랑했을까?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건축학개론' 승민은 정말 서연을 사랑했을까?

빛무리~ 2012. 5. 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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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영화는 남주인공 이승민(엄태웅)의 감정선을 따라 진행됩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련한 첫사랑을 추억하는 남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긴 여운을 되짚어 볼수록 이 영화의 초점은 오히려 객체로 표현된 여주인공 양서연(한가인)에게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분의 칼럼을 읽으니 남자의 기억 속에 첫사랑이 '여신'이면서 동시에 '쌍년'이기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의식적인 자기보호막 때문이라더군요. 아직 어렸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 미숙했던 시절, 세월이 흐른 후 돌이켜 보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를 만큼 못나고 찌질했던 시절의 자신을 차마 그대로 인정할 수 없기에, 잃어버린 첫사랑에 대한 책임은 온통 그 '쌍년'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거라고 말이죠. 어쩌면 영화 속 이승민은 남자들의 그러한 심리를 아주 잘 대변하는 캐릭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대부분의 경우 남자의 첫사랑은 여자의 첫사랑보다 훨씬 무겁게 다뤄집니다. 첫사랑을 무덤까지 갖고 간다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 그 이전의 사랑을 잊어버린다는 속설 때문일까요? 그래서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도 "남자의 첫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은 여자의 마지막 사랑뿐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걸까요? 하지만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 그 속설이 반드시 모든 경우와 일치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신'도 아니고 '쌍년'도 아니었던 평범한 그 여자 양서연의 첫사랑이, 평범한 그 남자 이승민의 첫사랑보다 훨씬 더 알차고 진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근무하는 건축사 사무실로 15년만에 서연이 찾아왔을 때, 승민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승민은 15년 전과 변함없이 정릉의 그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 서연의 존재는 더 이상 살아 숨쉬지 않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추억에 불과했던 것이죠. 하지만 제주도 섬처녀였다가, 서울로 유학 온 예쁜 여대생이었다가,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다가, 지금은 강남의 부유한 이혼녀가 되어있는 서연은 그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승민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집을 지어 달라는 핑계로 일부러 수소문을 해서 그를 찾아온 이유는 단지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찾고 싶은 희망 때문이었음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현재 승민에게는 같은 건축사에 근무하는 예쁘고 어리고 부유한 약혼녀가 있지요. 그들은 이제 곧 결혼해서 함께 유학을 떠날 예정입니다. 이러한 승민의 입장은 두 사람의 재회가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없도록 처음부터 제한하고 있는 셈이죠. 만약 승민에게 약혼녀 은채의 존재가 없었다면 서연과의 관계는 얼마든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영화의 지향점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첫사랑의 추억을 통해 자신의 과거 모습을 돌이켜보며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과 진실의 의미를 되새기지만, 추억은 단지 그쯤에서 그칠 뿐 현실은 변함없이 예정대로 이어지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첫사랑이라는 달달한 소재로 만들어졌지만, 환타지보다는 오히려 극명한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15년 전의 풋풋했던 그 시절, 승민(이제훈)에게도 분명 서연(수지)은 첫사랑이었겠죠. 그러나 표현하지 않고 혼자 머뭇거리다가 혼자 끝내버린 승민의 사랑은 그 실체가 사뭇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정말 서연과 마음을 주고받는 진짜 사랑을 원했던 것일까? 어쩌면 자기 환상 속에 존재하는 '여신'의 이미지를 억지로 서연에게 씌워 놓고 그 환상을 사랑하면서, 그 일방적인 짝사랑에 스스로 만족했던 게 아닐까? 승민은 그렇게 고백 한 번 못하고 가슴만 졸이다가, 그녀에게 또 다른 남자(유연석)가 다가서는 것을 보고는 맥없이 물러나 버렸습니다. 그 남자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조건을 지녔기에 자신감을 잃고 주눅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정말 사랑했다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죠. 

 

그런 승민에 비해 서연은 언제나 훨씬 더 솔직하고 적극적이었습니다. 동갑인데 편하게 지내자며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놓은 것도 서연이었고, '기억의 습작'을 함께 듣자며 승민의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아 준 것도 그녀였습니다. 동네의 폐가나 다름없던 빈 집을 예쁜 데이트 공간으로 만들어 승민과의 추억의 장소로 만든 것도 서연이었고, 소중히 여기던 전람회의 CD를 아낌없이 선물해준 것도 서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서기 위해 승민이 한 일은 거의 없군요.

 

승민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을 때 조심스레 다가오던 그의 입술은 알면서도 모른 체 기꺼이 받아들인 서연이었지만, 취기로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서도 다른 남자 선배의 키스 시도는 두 번이나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승민은 단호히 고개를 돌리며 선배를 거부하는 서연의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그들 앞에 과감히 나서기는 커녕 제풀에 주저앉고 말았네요. 그것은 서연을 향한 승민의 사랑이 껍데기였을 뿐, 진짜가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정말 서연을 사랑했다면 그녀와 남자선배가 단 둘이 자취방에 들어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녀가 원치않는 취중 성폭력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쾅쾅 문을 두드리며 빨리 나오라고 선배를 불러내도 모자랄 판에 조용히 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다가 찍소리도 못 내고 물러나더니, 엉뚱한 택시기사를 붙잡고 화풀이하는 승민의 모습은 정말 한심한 찌질이였습니다. 그래 놓고 승민은 오히려 서연을 '양다리나 걸치는 쌍년'으로 규정짓고는 자기 마음 속에서 지워 버립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짐작컨대 그 날 밤 서연의 자취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과감하고 당돌한 서연이지만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진 스무 살의 소녀로서, 원치 않는 폭력을 당해 순결을 잃었다면 그렇게 천연스런 모습으로 다시 승민 앞에 나타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아무리 삐삐를 쳐도 연락이 없어서 찾아왔다는 그녀에게, 승민은 선물받은 CD를 돌려주며 말합니다. "꺼져줄래?"

 

그 날 밤 자취방 앞에서 남자선배와 함께 있던 모습을 승민이 목격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서연으로서는 승민이 그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겠죠. 승민의 태도가 너무도 차갑고 단호하니 이유를 묻기도 겁이 났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서연의 미련한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첫 눈 오는 날 그 빈 집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서연은 홀로 지켰고, 날이 캄캄해지도록 오지 않는 승민을 기다리다가 혼자 돌아가면서도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젠가 그가 찾아와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으로, 전람회의 CD와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곱게 마루에 놓아두고 나왔죠. 승민은 그 CD를 돌려주며 자기는 CDP가 없어서 듣지 못한다는 핑계를 댔었는데, 그 뻔한 말조차 흘려보내지 않고 담아두었을 만큼, 승민을 향한 서연의 마음은 진실하고 간절했습니다.

 

아나운서 시험에도 번번이 낙방하고, 무엇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양서연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결혼을 감행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파경을 맞이했군요. 하필이면 이혼수속이 마무리되기 직전에 승민을 찾아온 그녀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혼의 표면적인 귀책사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서연이 거액의 위자료를 챙긴 걸 보면, 표면적 이유는 남편의 외도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임..) 사실은 결혼생활 중에도 승민의 존재를 잊지 못했을 만큼, 서연에게는 첫사랑의 흔적이 그만큼 강렬하게 남아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대충 결혼해서 아이라도 낳고 살다보면 잊혀지겠지 싶었으나, 예상과 달리 그녀 마음속 승민의 존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던 게 아닐까요? 

 

예쁜 얼굴을 무기삼아 돈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가 몇 년 후에 이혼하면서,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최대한 수속을 늦춤으로써 한 푼의 위자료라도 더 받아내려는 현재의 양서연은,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 스스로 말했듯이 '진짜 쌍년'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름 건실하게 살고 있는 이승민이 오히려 영악한 실속파처럼 보이고, 쌍년처럼 살고 있는 양서연의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허허로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15년 전의 이별이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승민은 서연에게 키스를 합니다. 회한, 격정, 죄책감...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진 키스였죠. 그러나 최소한 다시 시작하는 사랑의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승민은 약혼녀 은채와 예정대로 비행기에 탑승하여 머나먼 외국으로 떠났고, 서연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와 단 둘이 제주도의 넓은 집에 남았습니다. 서연에게 보내온 승민의 마지막 소포에는, 그녀가 첫 눈 오던 날 빈 집에 두고 떠났던 전람회의 CD와 휴대용 CDP가 들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었을까요? 내가 먼저 이별을 말했지만 사실은 나도 오랫동안 너를 잊지 못했노라고, 그래서 나중에 혼자 그 빈 집을 찾아갔고, 이것들을 발견해서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 왔노라고, 마지막으로 서연에게 로맨틱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그것들을 돌려보냄으로써 자신에게 남은 서연의 흔적을 완벽히 지워내고, 하마터면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흔들릴 뻔했던 자신의 현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려는 거였을까요? 저는 첫번째 가능성을 더 믿고 싶지만, 어쩌면 두번째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승민이라는 남자의 첫사랑은 허울뿐인 껍데기였습니다. 그저 첫사랑이라는 이름만 붙여놓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죠. 물론 타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해왔을 테고요. 그러나 양서연을 그림처럼 바라보며 동경하다가 혼자 실망해서 떠나버렸던 스무살의 이승민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자고로 유명한 '남자의 첫사랑'의 실체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진짜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이것을 극중 이승민과 비슷한 '어떤 남자들만의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모든 남자의 첫사랑이 다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 모든 이미지는 인용을 위해 첨부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 '건축학개론'의 제작사인 명필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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