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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 치욕스런 망국의 군주, 고종을 재조명하다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가비' 치욕스런 망국의 군주, 고종을 재조명하다

빛무리~ 2012. 3.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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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읽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해를 품은 달'에서 뜨거운 맛을 본 이후, 절대 영화나 드라마를 (완전히 다) 보기 전에는 원작소설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현재 개봉 5일째인 영화 '가비'는 여러 면에서 김탁환의 원작소설 '노서아 가비'와 비교되며, 호평보다는 혹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흥행 성적도 예상보다는 저조하기 때문에, 조급한 사람들은 '화차'의 김민희와 '가비'의 김소연을 비교하며 두 여배우의 승패를 가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화차'라는 영화도 안 보았고 원작도 읽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저는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짧고 아쉽게만 느껴지더군요.

사실 저는 개봉하기 훨씬 전부터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 고종황제의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졌을지, 저는 무엇보다 그것이 궁금하더군요. 고종황제는 치욕스런 망국의 군주일 뿐 아니라,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도 유약하고 무능하고 비겁하여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최악의 군주에 가까웠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을사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후 고종이 보여주었던 적극적인 대처는 결코 유약한 임금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을사조약 체결 후 불과 나흘만에, 고종은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에게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보호조약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니,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지는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의 공법학자 레이도 프랑스 잡지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 쓴 특별 기고에서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제가 중학시절에 국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짧은 일화도 고종에 대한 저의 호감을 오래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종이 시종일관 협상의 여지조차 내비치지 않고 을사조약을 완강히 거부하자, 일본은 그를 처소에 유폐시키고 황제가 없는 자리에서 대신들과 계약 체결을 진행했으며, 드디어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수결을 받아낸 후 황제에게 달려와 옥새를 찍으라고 협박했다. 그 상황에서도 고종은 끝까지 버티며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여럿이 달려들어 완력으로 황제의 손에서 옥새를 빼앗아다가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하긴 대놓고 명성황후를 암살한 자들인데, 황제의 손목을 비틀어 도장 하나쯤 뺏어가는 일을 주저했겠습니까?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 오전, 덕수궁 함녕전 서온돌에서 68세를 일기로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뇌일혈 혹은 심장마비였다고 하지만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시신 상태가 온전치 못했던 점으로 보아 독살의 가능성이 짙었습니다. 만약 독살설이 진실이라면, 고종황제는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암암리에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지간한 위험 인물이 아니고서야, 이미 순종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물러나 앉은 뒷방 늙은이를 굳이 독살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 고종의 의문스런 죽음은 뒤이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 '가비'에서 그려진 고종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 어떤 상황이 닥쳐도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는 포커페이스... 그 와중에 아주 짧게 순간 순간 드러내는 인간적 고뇌와 그리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면서도 절대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의 힘을 짜내서라도 어떻게든 국권을 수호해 보려는 끈질기고 굳건한 의지... 이미 역사의 죄인이 되어버린 임금은 시원스레 목놓아 울지도 못하였습니다. 표정없는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는 순간, 아릿하게 저려오던 가슴의 통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군요.

저는 이 영화가 고종황제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의 아내 명성황후도 지금은 비운의 위대한 국모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역사의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민비'라는 명칭으로 격하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욕으로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맞서며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제멋대로 나라를 뒤흔들던 여자라는 식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압도적이었지요. 그에 비한다면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종황제에 대한 재조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네요. 그 방면에서의 작은 성과만 거둘 수 있어도, 이 영화 '가비'는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후의 내용에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세요^^

 

어린 소녀 단이의 아버지 김우현은 역관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주된 업무는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타국 땅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미국, 러시아 등 여기저기 상단을 따라다니며 국제 미아처럼 떠돌던 소년 김종식은 우연히 그들 부녀와 만났고, 첫눈에 단이를 좋아하게 됩니다. "단이야, 단이야~" 그렇게 부르던 이름은 훗날 또 다른 그녀의 이름 '따냐'가 되었지요. 따냐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며, 김종식 또한 '일리치'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린 날 종식은 일본인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받은 돈으로 단이에게 줄 선물을 사들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시 머물던 곳으로 돌아오는데, 사실 그 일본인들은 고종의 심복 김우현을 암살하기 위해 파견된 자들이었습니다. 종식의 뒤를 밟은 자객들이 한밤에 들이닥쳐 김우현의 몸을 난도질하고 사라지자, 숨어있던 단이와 종식이가 달려나와 김우현의 임종을 지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김우현은 종식에게 당부했지요. "단이를, 단이를 지켜다오!" 과연 종식은 죽는 날까지 그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유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단이가 자기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불행해졌다는 사실도 항상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며 잊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레 연인이 된 따냐(김소연)와 일리치(주진모)는 방약무인하게 러시아 대륙을 누비며, 커피(당시 귀중품이었던..)와 금괴를 훔치는 대도(大盜)로 성장합니다. 당시만 해도 이들에게 별다른 애국심 따위는 없어 보였지요. 하지만 러시아 군대에 잡혀 총살당할 뻔했다가,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에게 구원받고 '가비 작전'에 투입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가비 작전'이란 커피에 독을 타서 고종(박희순)을 독살하려는 일본측의 음모를 뜻하는 것으로, 따냐가 그 전면에 나서게 되지요. 동시에 일리치는 사카모토라는 이름의 일본 군대장으로 변신하여, 전국 각지의 의병을 척살하며 조선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에 투입됩니다. 일본에게 진 목숨빚을 갚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다코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던데, 그녀의 정체는 끝까지 미스테리하게 남는군요. 사다코는 처음부터 일리치가 김종식임을 알면서 구해준 것이었고, 일리치는 속속들이 일본인인 척하는 사다코가 사실은 배유정이라는 이름의 조선 여자임을 곧 알아냅니다. 그들은 어릴 적에 스치는 인연이 있었던 듯하고, 일리치를 바라보는 사다코의 눈빛에서는 짝사랑의 기미가 살짝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끝내 아리송하군요.

커피라는 소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주제와 연결시켰더라면 좋았겠지만, 단순히 소재에만 머문다 해도 큰 결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저 일리치와 따냐는 어려서부터 커피를 좋아했고, 그래서 커피원두를 훔치는 도둑이 되었고, 커피를 잘 내리는 바리스타가 되었지요. 그런데 때마침 아관파천을 감행한 고종은 그 무렵 처음으로 커피를 맛본 후 커피 매니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다코는 따냐에게 '가비 작전'의 책임을 지워 궁중 바리스타로 들여보냈던 것이지요. 나중에 고종은 따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가비의 쓴 맛이 좋다. 왕이 되고부터는 무엇을 먹어도 쓴 맛이 났다. 그런데 가비의 쓴 맛은 오히려 달게 느껴지는구나..."

따라서 이 영화의 주된 시대적 배경은 1896년, 공간적 배경은 고종이 거처하던 러시아 공사관입니다. 명성황후를 잃은 후 날마다 독살의 위협을 느끼며 통조림과 날계란으로 연명할 만큼 예민해져 있던 고종은, 원래의 바리스타를 밀어내고 갑자기 등장한 따냐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외국에서 파견된 첩자라고 의심합니다. 그녀가 따라주는 커피를 마시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지요. 그러나 민영환을 통해 따냐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고 난 후부터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녀를 신뢰하며 보호하기 시작합니다. 충신 김우현의 억울한 죽음은 아직도 왕의 마음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던 것이지요.

언뜻 보면 고종과 일리치가 따냐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듯한 형상이지만, 제가 보기에 고종과 따냐의 관계에는 이성적인 감정이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의병 세력을 규합하여 3만 정예의 조선 군사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몰래 추진하는 중이었습니다. 고종의 대사를 들어 보니, 당시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 3만의 군사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임금의 모습에 감동한 따냐는, 스스로 궁녀의 소복을 입고 (아관파천 시기는 명성황후의 상중이므로 모든 궁중 인물들은 소복차림으로 등장합니다. 고종도 예외는 아니고요..) 일리치와 사랑을 맹세했던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 행동들은 왕의 여자가 되겠다든가, 고종을 사랑하여 일리치를 버리겠다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궁녀의 옷을 입은 것은 특정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없던 그녀가 비로소 자신이 조선인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반지를 뺀 것은 더 이상 일리치와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왕에게 진심으로 감복하고 말았으니 그녀는 더 이상 '가비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작전 수행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일본에 죽임을 당할 것이고, 정체가 들통나면 조선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자기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한 따냐는, 일리치 혼자만이라도 하루빨리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일리치는 그녀를 두고 갈 사람이 아니었지만요.

두 남자 배우, 주진모와 박희순이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얼핏 고종과 일리치도 비슷한 연배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사실상 고종은 따냐의 부친 김우현과 같은 연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냐를 바라보는 왕의 눈빛 또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뜨거운 눈빛은 아니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던 충신이 남긴 한 점 혈육을 바라보는, 애틋한 어버이같은 눈빛이었지요. 유치한 삼각관계가 아니라서 저는 더욱 좋았습니다. 저의 개인적 관점에서 볼 때, 영화 '가비'는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싶을 만큼 아주 괜찮은 작품이었어요.

오늘도 역시 많은 스포일러를 유출하고 말았지만, 가장 중요한 후반부의 내용과 결말은 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압권은 고종과 일리치가 1:1로 맞붙어 설전을 벌이던 장면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멋진 대사 한 마디씩을 이 리뷰에 덧붙이고 싶군요.

고   종 :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삶이 죽음보다 백 배나 치욕스러울지라도, 나는 살아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일리치 : 오직 저만 바라보던 그녀가, 전하를 알게 되면서 조선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렇게 되어버린 제 곁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대사를 떠올리면, 그에게 따냐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새삼 절감하며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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