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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초인(강동원)은 정말 악역이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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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초인(강동원)은 정말 악역이었을까?

빛무리~ 2010. 11. 1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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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 고수 주연의 '초능력자'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명확히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인 듯 싶습니다만, 제게는 아주 괜찮은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하게 느껴진 것은 두 명의 주인공 중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특이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매우 신선합니다.

*** 영화 리뷰에는 스포를 자제하려 노력하는데, 이번에는 쓰다 보니 스포가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1. 초인(강동원)

그는 어려서부터 눈빛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지녔습니다. 자기 아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어머니는 그의 두 눈을 붕대로 가려 놓았지만, 초인은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소리를 듣고 분노를 느끼며 스스로 붕대를 풀어 버렸지요. 그의 눈빛에 조종당한 아버지는 자살했고, 어머니는 이 무서운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 나머지 아이를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 했지만, 초인은 어머니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그 때부터 혼자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초인에게 있어 초능력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남들과 다른' 그 능력은 그를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부모에게서마저 버림받게 만드는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그에게 있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그 부모가 아이의 초능력을 끔찍한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질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면 어땠을까요? "너의 능력은 결코 아무 때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때처럼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남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니 너는 참으로 축복받은 아이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해 주었더라면 초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그의 초능력을 저주의 굴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초인의 모습은 상처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 능력을 지녔다면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꿈도 꾸어 볼만한데, 은둔형 외톨이로 자라나 어른이 되었어도 정신연령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초인에게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전당포에 들어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약간의 돈을 훔쳐내 오는 것뿐입니다. 금고를 몽땅 털어갈 수도 있으련만, 그가 가져가는 것은 아마도 생활비로 사용하려는 듯 얼마 안 되는 액수입니다. 그에게 홀렸던 전당포 주인은 나중에서야 왜 장부에 적히지 않은 돈이 약간 비는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해 어리둥절하지요.

그러다가 뜻밖에도 그의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자주 들르던 전당포의 새로운 직원 임규남(고수)입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얼음' 자세로 있는데 그 중에 혼자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규남을 보았을 때, 초인의 놀란 눈빛은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그것이었습니다. 당황한 그는 전당포 주인을 조종하여 규남에게 전기충격기를 쏘도록 하려 했는데 중간에 철창이 가로막혀 있었고, 초능력에 홀려 그 틈새로 무리하게 머리를 들이밀며 다가오려 하던 전당포 주인은 늘어난 철창에 목이 걸려 매달린 채 죽고 말았습니다. 초인에게 사람을 죽일 의도는 전혀 없었건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초인은 한쪽 다리가 잘려서 의족일 뿐 아니라 체력도 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초능력을 제외하고는 아무 능력도 가진 게 없는 셈이지요. 그러니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 임규남과 1:1로 맞붙게 되면 계속 얻어터지기만 하고 백전백패입니다. 규남은 초능력은 없지만 신체적 능력은 인간 중에 최고 수준이거든요. 규남의 건장한 체격과 넘치는 힘과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은 그 자체가 일종의 초능력이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초인이 규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조종당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규남은 초인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를 없애야겠다는 사명감을 불태우며 적극적으로 쫓아다닙니다. 이제껏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왔던 초인에게 있어,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겁박해 오는 규남의 존재는 대단히 위협적입니다. 규남에게는 초능력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찌나 힘이 세고 날렵한지 수십명을 조종해서 그를 막아보려 해도 쉽지가 않군요. 가끔은 초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눈빛이 흐려지고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규남에 의해서 보호막을 잃은 은둔형 외톨이는 그 때부터 진짜 악인이 되어 갑니다.

규남을 막기 위해서 초인은 수많은 사람들을 2~3층 높이에서 뛰어내리게도 만들고,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를 달려오는 전철 앞으로 날아가게도 합니다. 세상을 적대시하며 담을 쌓고 살아 온 초인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데 타인의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던 초인은 결국 규남에 의해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사용한 초능력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얼핏 보면 초인을 악으로, 규남을 선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초인은 악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상처받은 자아를 간직하고 스스로 쳐 놓은 벽 속에 갇혀 살던 어린아이였을 뿐입니다. 그는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시키고 미워하는 이 사회의 피해자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이해하고 품어 주어야 했던 부모마저도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으니까요. 죽음을 앞두고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초능력을 발휘하던 그 눈빛은 담담했고, 차라리 홀가분해 보였습니다.

2. 임규남(고수)

영화를 보기 전에 제가 읽었던 많은 리뷰들은 규남의 시각으로 서술된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규남은 초인과 대척점에 서서 절대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초인은 초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강자이고, 규남은 초능력이 없으니까 약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규남은 진실을 말하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니까 더욱 기막히게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초인을 세상의 권력자로 놓고, 규남을 그에 항거하는 민중으로 보기도 합니다.


규남은 초인에게 조종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해 보려고 발버둥칩니다. 전철 앞으로 날아가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날리다가 머리가 깨져서 피를 철철 흘리도록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규남은 이렇게 희생적인 정의의 사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게 좀처럼 몰입할 수 없더군요. 시종일관 "왜 저렇게까지 오버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초인이 누차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을, 네가 점점 더 크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지요. 그 말이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당포 주인이 죽던 장면을 규남도 보았으니 초인이 의도적으로 살해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초인은 말하자면 푼돈을 훔치고 다니는 좀도둑이었을 뿐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악마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물론 좀도둑이든 과실치사든 범죄는 범죄니까 잡아서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규남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세상의 절대악을 응징하겠다는 듯이 쫓아다녀야 할 일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심각한 부작용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규남이 자신도 모르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지요. 사실 규남이 죽자고 초인을 쫓아다니지만 않았다면 애꿎은 사람들이 수없이 다치거나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도둑 한 명 잡자고 수십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규남의 행위는 정의일까요?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영웅심리가 아닐까요? 스스로 가장 선하고 정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그 함정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규남이라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려는 욕망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고 자기가 영웅이 될 수만 있다면, 그 과정 중에 애매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저는 솔직히 이런 사람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한 가지의 정의만 있는 게 아닌데,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가 옳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설득을 당하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친구들과 격의없이 지내는 모습 때문에, 규남이 '다름'에 대해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부색이 다른 것만 받아들일 뿐, 평범하지 않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것 또한 일종의 '다름'인데 말입니다. 혹자는 초인이 저지른 범죄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융통성없이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너를 없애야겠다며 몰아붙일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약간 과대 해석을 한다면, 영웅심리를 지닌 규남은 자기와 상반된 능력, 자기에게 없는 한 가지 능력을 지닌 초인을 보자,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본능적인 승부욕이 불꽃처럼 일어나서 계속 싸움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초인을 만나기 전에는 숨겨져 있던 거대한 욕망과 능력이 비로소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정의의 사도처럼 묘사된 규남은, 제가 보기엔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을 배척해서 외톨이를 양산하는 이 사회의 단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따의 주동자는 의외로 자기가 굉장히 성격 좋고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고 따돌림 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는 더욱 모르지요. 자기가 배척하는 상대는 '그럴만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자기는 항상 옳습니다. 옆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누군가 바른 말을 해 주어도 절대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규남은 어떻게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닮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글을 쓰면서 상당히 과장된 표현을 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특히 선량한 인물로 묘사된 규남을 너무 나쁘게 해석한 것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꼭 그렇게만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규남이라는 캐릭터의 좋은 점도 물론 인정을 했지요. 그러나, 다른 분들의 관점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저의 견해를 강력히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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