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종영 드라마 분류/닥터 진 (6)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나는 항상 그대에게 편지를 쓰곤 했소. 글 공부를 하다가도 무술 연습을 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가슴 벅찬 설렘에 혼자 얼굴을 붉히곤 했노라고, 나는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밤마다 적어 내려갔소. 혹시 그대가 읽는다면 못난 사내라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나는 그대에게 하고 싶은 소소한 말들이 너무나 많았던 거요.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면, 그대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곤 했소. 오늘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그대도 가끔은 내 생각을 하며 미소짓는 순간이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뒤척이다가 치솟는 그리움에 몸이 달아오르면 방을 뛰쳐나와 찬바람을 쐬며 심호흡도 하고... 그렇게 밤새도록 엎치락 뒤치락 그대 모습만 떠올리다 부옇게 밝아오는 동쪽하늘을 맞이한 새..
너무 강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김경탁(김재중)의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듯 합니다. 서출이라는 태생적 설움은 일찌기 짐작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 슬픔을 디딤돌 삼아 절치부심하고 독하게 노력하여 나중에는 이복형 대균(김명수)의 뺨을 치는 야심가로 성장할 거라고 예상했었죠.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그의 눈빛은 왠지, 작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순한 남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멀어 보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영래(박민영)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도 처음부터 순도 100%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녀를 사랑하는 진심이 70~80% 가량은 되겠지만, 나머지20~30% 쯤은 집착과 소유욕 등의 감정도 섞여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김경탁은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
초반에는 예상치 못한 타임슬립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리둥절한 설정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애써 다독였습니다.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다 알고 보는 것이지만, 주인공 진혁의 입장에서는 매 순간마다 그저 생존하는 것만도 벅찼을 테니까요. 그 다음에는 약재를 개발하거나 환자를 치료하는데 힘쓰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깊은 감정을 표현해야 할 내용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런대로 볼만하다 싶었습니다. 다른 연기자들은 모두 사극톤으로 대사를 하는데 혼자만 엄청 튀고 어색하게 현대극톤의 대사를 하는 것도, 모두 타임슬립 설정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에 달했군요. 총 20부작으로 기획된 '닥터 진'은 이제 12부까지 방송되었습니다. 중반을 넘긴 만큼 등장인물 간의 갈등도 증폭되고 서로를 ..
1. 어머니의 작별 인사 '닥터 진' 11회에는 유독 가슴을 울리는 명장면과 명대사가 많았습니다. 진혁(송승헌)과 홍영래(박민영)와 흥선군(이범수)은 좌의정 김병희(김응수)의 계략에 빠져 대왕대비(정혜선)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는데, 죄목은 너무 큰 데다가 누명을 벗을 길은 막막하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요. 영래의 어머니(김혜옥)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딸자식을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자 옥리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사정하여 간신히 옥사 안으로 들어오는데, 모진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영래를 마주하자 회한의 눈물을 금치 못합니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 걸 그랬구나!" 고분고분히 말을 듣고 평범한 여인으로 살았더라면 이토록 험한 운명에 처..
'닥터 진' 7회의 중심부에서 극을 이끌어간 캐릭터는 진혁(송승헌)과 홍영래(박민영)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흥선군 이하응(이범수)이나 종사관 김경탁(김재중)도 아니었습니다. 이름없는 풀꽃의 은은한 향기와 초록빛을 지녔던 여인... 고달픈 삶 속에서도 고이 간직해 왔던, 오직 하나뿐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진 여인... 기녀 계향(윤주희)이 바로 7회의 주인공이었지요. 드라마 전체를 볼 때 그녀가 등장한 분량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나, 짧은 동안에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불태우고 떠난 인물이 아닐까 싶군요. 계향의 캐릭터가 더욱 의미있는 까닭은, 그 인물 자체가 철저한 '약자'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생이란 겉보기에만 화려할 뿐, 사실은 서민보다도 못한 처지의 최하층민이죠. 노류..
아주 오래 전부터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노라고... 그녀가 하늘의 도리를 들어 나를 꾸짖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그녀는 글썽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는데, 볼썽사나운 눈물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그녀를 외면한 채 황급히 말에 올라 도망쳐 버렸구나.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그녀에게 또 다시 희망을 품었던 거다. 혹시 그녀가 어린 시절처럼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더 이상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예전처럼 따스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서출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어린 시절, 오라비 영휘보다도 먼저 내게 다가와 당돌한 눈빛으로 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