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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갈등'이다. 갈등 없이는 어떤 드라마도 만들어질 수 없기에, 드라마는 '갈등'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갈등은 바로 '악역'에게서 비롯된다. 현실 속 세상이 그렇듯이 드라마 속 세상에도 나쁜 인간들이 존재하고, 그 나쁜 인간들의 활약이 도드라질수록 드라마의 갈등은 심화되며, 갈등이 심화될수록 드라마의 흥미는 더해진다. 때로는 막장이라고 욕을 먹기도 하지만, 솔직히 악역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최후에 그 악역이 몰락하면서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줄 때의 쾌감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매력적인 악역은 그 존재감으로 선한 주인공을 제압하며 해당 드라마의 최고 인기 캐릭터로 자리잡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고현정이 열연했던 '선덕여왕'의 '미실..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
'대장금'과 '서동요' 이후 김영현 작가의 사극에 매료된 나는 '선덕여왕'과 '뿌리깊은 나무'를 시청하며 그녀의 필력을 극도로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요즘 시대에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고, 작품을 감상하다가 실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외국에 수출될 경우는 좀 더 오해의 소지가 많겠으나, 방영 전에 자막으로 '이 작품은 허구와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물로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면 큰 문제는 되지 ..
현고운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로맨틱 코미디 사극'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표방하며 출발했다. 남주인공 왕소(장혁)는 고려의 제4대 임금 광종(光宗, 925 ~ 975)이며, 여주인공 신율(오연서)은 발해의 마지막 공주로 설정되어 있는데 주요 캐릭터 중에는 거의 유일한 가상 인물이다. 왕소의 연적 왕욱(임주환)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광종의 이복형제이며 8대 임금 현종의 부친으로 기록된 인물이고, 신율의 연적 황보여원(이하늬)은 광종의 비(妃)인 대목왕후(大穆王后)로서 역시 실존 인물이다. 일단 묵직하고 비장한 시대적 배경에 마음이 끌리는데, 어울리지도 않는 코미디 욕심 때문에 망가질 듯하여 미리 걱정을 좀 했다. 하지만 첫방송을 보니 의외로 코믹 요소가 자연스..
요즈음 나는 공포스럽도록 지독한 '드한기'에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드한기'가 무엇의 줄임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뜻은 '도통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서 지루한 시기'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평소 드라마 시청을 즐길 뿐 아니라 리뷰를 쓰는 활동을 통해서도 일상의 활력을 충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시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각종 드라마는 여러 방송국에서 차고 넘치게 방송되고 있으며 새로운 작품들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어째서 당최 볼만한 것이 이토록 없는 것일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황금의 제국'이 방송되던 6월부터 9월까지는 정말 행복했었다. 그 두 작품 외에도 썩 괜찮다 싶은 드라마가 초가을 까지는 제법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부터는 거의 전멸 수준이..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도,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다 해도, 저는 언제나 솔직할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많은 기대를 품고 기다렸던 만큼 제발 김지우 작가의 전작들 '부활', '마왕'에 필적할만한 명작으로 태어나 주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벌써 4회까지나 방송이 되었는데도 강력한 포인트 하나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것을 보면, 안타깝지만 이쯤에서 기대를 접어야 하는 걸까 싶네요. 단순한 개인적 원한 관계를 넘어 친일 역사 청산이라는 거대한 소재를 끌어들였다는 점, 그에 따라 공간적 배경이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는 전작들보다 스케일이 커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저 스케일만 크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막무가내로 키워놓은 스케일을 감당 못해 헉헉대다가..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가 본 최고의 드라마로 기억하고 있는 '부활'의 콤비, 김지우 작가와 박찬홍 PD가 다시 뭉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상어'는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부활'과 '마왕'에 이은 세번째 복수극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설렘을 억누를 수가 없었죠. 김지우 작가의 복수극은 치밀한 전개로 스토리 자체가 긴박감 넘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복수라는 주제에 휘말려 등한시하기 쉬운 인간의 섬세한 감정들을 몹시도 리얼하게 표현해 주는 탓에, 언제나 극대화된 슬픔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거든요. 복수란 본질적으로 행복한 것일 수 없기에,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복수를 응원하면서도 가슴 한켠으로는 복수의 당위성을 고민하기도 하고, 복수의 과정 속에 점점 망가져 가는 주..
아역에서 성인역으로 교체된 후, 손영목 작가의 '메이퀸'은 김순옥 작가의 '다섯 손가락'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확연한 승세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순옥 작가 특유의 자극적인 스토리로 무장한 '다섯 손가락'의 약진이 예상되던 초반과는 좀 다른 양상이죠. '메이퀸'은 촘촘한 구성과 개연성 있는 스토리뿐 아니라 각각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많이 등장시켜 다채로운 재미를 선사하는 반면, '다섯 손가락'은 의외로 단순하고 진부한 선악 대결 구도를 진행하고 있으면서도 독한 대사들에 너무 치중한 탓인지 캐릭터의 개성조차 말살시키는 패착을 두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역과 악역이 나뉘어 있지만, 인물들이 모두 어찌나 독하고 무섭고 이기적인지 다 비슷해 보여서 선역과 악역의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예요. 독..
제 생각에 요즘 '추적자'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서회장(박근형)입니다. 주인공 백홍석(손현주)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강동윤(김상중)의 존재감이 강해지긴 했지만, 아무리 몸부림쳐 봐야 서회장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소록소록 전해지는군요. 거의 표정 변화 없이 냉철하고 강인한 남자의 기상을 풍기는 강동윤의 얼굴도, 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서회장의 능글맞은 얼굴과 마주치면 삽시간에 그 빛을 잃고 맙니다. 게다가 연륜과 통찰력이 묻어나는 서회장의 기막힌 대사들이라니, 요즘은 박근형이 입만 뗐다 하면 저절로 명언 퍼레이드가 되고 마네요. 분명히 악역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회를 거듭할수록 서회장의 캐릭터에 푹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회장에게도 부인..
섣불리 환호성을 지를 수 없는 이유는 근래 들어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가도 어처구니 없을 만큼 약한 뒷심으로 실망을 안겨준 드라마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회 수준의 완성도를 끝까지 유지할 수만 있다면 '추적자'는 대박 중에서도 대박 드라마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시청률을 석권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작품성 면에서도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의 진정한 수작(秀作)이 될 거예요. 물론 초반의 기세를 마지막회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탄탄한 연기력이 검증된 출연진은 불안한 와중에도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입니다. 일단 그 이름만으로도 굵직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두 남성배우, 손현주와 김상중이 양쪽에서 튼실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