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24)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나... 그대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기에, 꼭 전하려 하였습니다. 이미 살고 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산들 어떻고, 죽은들 어떻겠습니까? 다만 삶과 죽음의 강이 그대와 내 사이에 가로놓여, 차마 나의 말을 전하지 못하게 할까봐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덕만(德曼), 그대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대는 알아 주셨는데 오히려 내가 몰랐습니다. 내가 그대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대는 믿어 주셨는데, 오히려 내가 그대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 말로야 어찌 이 아픔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누구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나를 알아주셨던 그대이기에, 이 못난 사내의 어리석음조차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이렇게 달려갈 뿐입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모르던 나의 손을..
어머니,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처럼 지금도 고우시겠지요? 세월의 강을 건너 이제는 장성하였건만, 아직도 저는 어머니의 꿈을 꿉니다. 어리석은 제 마음을 아신다면 어머니, 무어라 탓하실지 모르겠군요. 어머니가 안 계신 이 땅에 허위허위 돌아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할 것을 알았기에, 저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칼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실은 소름끼치게 강했습니다. 그녀가 제 귀에 속삭일 때, 저는 죽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부모를 내가 죽였노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 앞에, 저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 앞에서 저는 무력한 어린아이였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원수 앞에서 그렇게 초라했습니다. 미실은 이미 오래 ..
나는 왕이다. 비담, 너는 모른다. 너는 왕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지금도 어미 잃은 송아지처럼 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어찌 나를 사랑했단 말이냐. 한 번도 너를 바라본 적 없는 나를, 너는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더란 말이냐. 평범한 여인에게는 온 세상일 수도 있었을 너의 가슴이, 왕인 나에게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을, 너는 하필 그 가슴을 나에게만 열었더란 말이냐. 왕의 길을 가려고 유신의 손을 뿌리친 순간부터 나는 사람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었다. 유신도, 춘추도, 너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다. 왕이란 그런 것이다. 정치라는 냉혹한 장기판에서, 이용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 또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이유가 있..
스승님, 서라벌을 떠나 유람을 하실 때에도 사람들은, 국선이 태백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노라고 말했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로 신선이 되어 영원히 살고 계시는군요. 지금도 저를 내려다보면서 "못난 놈" 이라 탄식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못난 놈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는 한 번도 잘난 놈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군요. 잘났거나 못났거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오직 따뜻한 시선과 따뜻한 손길뿐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너무나 추웠고, 지금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춥습니다. 못난 놈이라서 이렇게 평생 추워야만 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잘난 놈이 되어야 했을까요? 대체 잘난 놈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유신과 같은 자입니까? 아마도 그런 모양입니다. 스승님께서 못난 저를..
유신(庾信), 자네를 향한 나의 믿음이 헛된 일이었단 말인가? 나의 판단이 그릇된 것이었단 말인가? 말을 해 보게. 자네의 흉중에 담긴 진정한 포부가 무엇인지를 말일세. 나 월야(月夜)의 두 어깨에는 60만 가야백성의 한과 더불어 내 아버지이신 월광태자(月光太子)의 슬픔이 깃들어 있네. 부친께서는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인해 태어나셨으니 명백한 신라왕실의 외손자이셨으나, 신라는 일방적으로 동맹을 깨뜨리고 장군 이사부의 정예군을 보내어 우리 대가야를 공격해 왔네.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인물은 화랑 사다함이었네. 배신당한 우리 대가야의 군사와 백성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네. 가야산에서 흘러내려 온 우리 비옥한 땅의 내천들은 피로 물들었지. 자네는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가야를 점..
새주님, 미실 새주님... 세상에 당신 같은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까지 어머니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셨으면서, 그 버린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물려주고 가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 쉽게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들었기에 더욱 미워합니다. 어쩌면 당신의 말씀이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도 많이 닮았기에, 끝내는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항거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잔인함만 아니셨다면 나는 최소한, 조금은 더 오랫동안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이루지 못할 꿈이라 해도, 당신과는 달랐던 나의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았다면 그 동안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나의 첫번째 꿈은 스승이셨던 문노공께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미실..
친구,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내가 왜 항상 자네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자네의 어머니이신 미실 새주님께 대한 나의 충성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말일세. 이제껏 나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자네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이제껏 나 자신이 꽤나 처세에 능한 자라고 생각해 왔네. 최고 권력자이신 새주님께 충성하는 것은 나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함이라 여겼으며, 그분의 아들인 자네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나의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스스로도 몰랐던 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네. 나는 가식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사실은 진심으로 자네와 새주님을 신뢰하고 있었던 걸세. 나는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일세. 내 어린시절..
미실(美室), 그대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설원공께는... 미안합니다." 나는 그대의 인사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나는 결코 그대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 몸과 영혼이 오로지 그대의 것인 나에게, 그대가 미안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마지막 부탁은 나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그대가, 나의 고통을 낱낱이 헤아리실 그대가 나에게 차마 따를 수 없는 명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껏 그대라는 빛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대가 없는 세상이란 나에게 암흑일 뿐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남은 자들을 인도하며 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
비담, 내 아가... 이 어미를 원망하느냐? 그래, 원망하여라. 그 힘을 딛고 일어서거라. 그것이 네 어미의 운명이었고, 이제는 너의 운명이니라. 네 어미는 여인으로, 진골 성분으로, 게다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바치던 여인들의 혈통)의 후예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갖가지 잔인한 운명의 족쇄가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에게서 색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그저 삶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여겼다.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내게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사다함랑을 만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삶을 꿈꾸었다. 차라리 몰랐어야 할 꿈이었다. 찬란한 봄날과도 같았던 그 짧은 행복은 머지않아 산산히 부서져내렸고, 네 어미의 삶은 바뀌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운명에 항거하기 시..
유신랑(庾信郞), 당신은 내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나요? 나는 카탄 아저씨를 따라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나를 구하려고 연기를 들이마셔서 얻게 된 우리 엄마 기침병도 고쳐주고 말이예요.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저 멀리 서역 어디에선가 당신을 만났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나는 두려움도 눈물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모두가 내게는 즐거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예요. 나의 앞날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요. 나는 그렇게 철모르고 용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