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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덕만공주의 편지 - 김유신에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선덕여왕' 덕만공주의 편지 - 김유신에게

빛무리~ 2009. 11. 7.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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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랑(庾信郞), 당신은 내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나요? 나는 카탄 아저씨를 따라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나를 구하려고 연기를 들이마셔서 얻게 된 우리 엄마 기침병도 고쳐주고 말이예요.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저 멀리 서역 어디에선가 당신을 만났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나는 두려움도 눈물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모두가 내게는 즐거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예요. 나의 앞날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요. 나는 그렇게 철모르고 용감한 소녀였는데... 

하지만 나는 신라의 공주, 마지막 남은 성골, 그리고 개양성의 별 아래 태어난 여인... 내 어릴적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신랑, 나는 지금껏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왠지 돌이켜보면 무언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에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게 운명이라는 걸까요?


언니 천명공주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과 더불어 그 작은 배를 타고 멀리 어디론가 흘러갔겠지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면, 우리의 운명은 바뀔 수도 있었을까요? 하지만 가엾은 언니의 운명이 거기까지였으니, 우리 또한 결국은 자기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신랑, 당신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왕이 되겠다는 나의 새로운 꿈은 허황되고 무모한 것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내게 정인으로서나, 신하로서나 더없이 든든하고 유능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런 당신이 나를 위해 미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다른 여인과의 혼인을 결심할 때, 나는 스스로의 무력함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걸었으나, 아직도 약한 나는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미실에게 쫓겨 궁 밖으로 초라하게 달아날 때도, 당신은 기꺼이 뒤에 남아서 나를 지켜주었지요. 만약 그렇게 이별한 후, 당신이 궁 안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기라도 했다면 나는 영영 그대에게 보답할 길이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듭니다. 나는 이미 언니의 목숨빚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엄마(소화)의 목숨빚이 더해졌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이의 목숨빚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걸었습니다. 호랑이 입 속에 팔이 아니라 머리를 들이민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나 때문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내 앞에 누워 있는 언니와 엄마의 모습을 보던 순간의 잔인한 고통을 생각하면, 내 안에서는 그 어떤 두려움도 고통도 힘을 잃고 맙니다. 예리한 칼로 가슴을 저며낸들 그보다 더 아프겠습니까?


당신이 결사반대하며 나를 만류하실 때, 나는 단호하게 말했지요.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그르치는 자는 나의 신하도, 정인도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기뻤습니다.

때때로 내가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당신은 곁에서 매몰차다 싶을 만큼 나를 다그치며 강하게 일어서라고 재촉하곤 했었지요. 나는 매번 그런 당신에게 의지하며 일어섰지만, 오직 나를 주군으로만 섬기는 듯한 당신의 모습을 보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지(死地)로 걸어들어가는 나를 애절하게 붙잡던 그 순간의 당신에게서, 오래 전 나에게 연모의 정을 고백하던 그 시절의 유신랑을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내가 스스로 뿌리친 마음이었지만, 여인으로서 나의 행복을 모조리 포기하면서 뿌리친 마음이었지만, 아무리 떨치려 해도 당신에 대한 연모의 정은 내 가슴에 뿌리박혀 떨쳐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여인의 몸으로 남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에, 그 버거움과 고단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이 나는 외로웠습니다. 유신랑, 당신은 그 속에서 여인인 나를 발견해 준 첫번째 사람이었고, 나를 여인으로서 사랑해 준 첫번째 남자였습니다.

낭도로 생활할 때에도, 왕이 되기 위해 달리고 있는 지금도,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은 엄청난 장애물이요 걸림돌일 뿐이었지요. 그러나 유신랑, 오직 당신을 생각할 때만은 여인으로 태어난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의 마음속에도 여인으로서의 내 자리가 굳건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금 미실의 화살 앞에 당당히 팔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우리는 눈 앞의 운명조차 확신할 수 없고, 모든 일은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버릴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있기에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당신은 춘추를 도와 대업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차마 입을 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유신랑, 당신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알지 못했을 행복입니다. 비록 나는 매정한 연인이요 약한 군주로서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지만, 그래도 고마운 당신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다음 순간 내가 죽음을 맞더라도, 이 마음만은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유신랑, 듣고 계시지요?



* 이 블로그에 게시된 선덕여왕 관련 모든 편지들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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