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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실의 마지막 편지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선덕여왕' 미실의 마지막 편지

빛무리~ 2009. 11. 1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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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내 아가... 이 어미를 원망하느냐? 

그래, 원망하여라. 그 힘을 딛고 일어서거라. 그것이 네 어미의 운명이었고, 이제는 너의 운명이니라.


네 어미는 여인으로, 진골 성분으로, 게다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바치던 여인들의 혈통)의 후예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갖가지 잔인한 운명의 족쇄가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에게서 색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그저 삶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여겼다.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내게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사다함랑을 만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삶을 꿈꾸었다. 차라리 몰랐어야 할 꿈이었다. 찬란한 봄날과도 같았던 그 짧은 행복은 머지않아 산산히 부서져내렸고, 네 어미의 삶은 바뀌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운명에 항거하기 시작했던 거다.

나는 수없이 자신에게 다짐했다. 하늘의 뜻이란 없노라고, 모든 것이 이 미실(美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하늘의 뜻'은 나에게 있어 참으로 유용한 통치 도구가 되어 주었을 뿐이다. 나는 항상 나의 뜻에 '약간의 하늘의 뜻'을 더하여 백성을 사로잡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미혹(迷惑)되기 쉬운 존재이더냐? 더구나 하나같이 여인의 미색 앞에 맥을 추지 못하는 세상 남자들이란 나에게 있어 가장 다루기 쉬운 노리개들이었다. 나는 그 잘난 숱한 남자들을 내 앞에 무릎꿇렸다.


그런데 비담, 너를 만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하늘이 두려워졌다. 네 얼굴을, 네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수많은 자식을 낳았으나 비정하게 버린 아이는 너 하나뿐이었는데, 어찌하여 그 모든 아이들 중에 하필 네가 나를 가장 닮았다는 말이더냐! 애써 거부하려 했던 하늘의 뜻이 너를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결국 네 어미는 운명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거다.

나는 너의 생부 진지제를 내 손으로 쳐냈다. 그것은 네 아비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을 지키기만 했더라면, 나는 황후가 되고 너는 왕의 후계자가 되어 그 다음의 꿈을 꾸며 태평성대를 이끌어갔을지 누가 알겠느냐? 하지만 그의 배신으로 네 아비와 어미는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말았으니 내 아가, 너의 운명은 이 어미보다 더욱 모질게 시작되었구나.


내 아들이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이기에, 나는 너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아들일 뿐이라면 내가 품을 것이요, 그의 아들일 뿐이라면 가까이 두고 경계할 것이로되, 너는 내게 있어 품을 수도 경계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를 나는 버리기로 결심했다. 눈앞에서 멀리 치워 두고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나의 본능적인 모성이 수시로 너를 떠올렸던 거다. 그런 내 눈앞에 누구보다 나를 닮은 눈빛의 네가 나타났다.

세월의 강을 건너 다시 만난 내 자식은, 나의 최대 적수인 덕만공주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덕만이 궁으로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던 일식 사건에서도 내 아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정녕 하늘은 모질고도 모질었다.


그러나 나는 주저앉지 않았다. 하늘은 나의 오만함을 미워하셨을지 모르나,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내가 오직 공포로만 다스렸다면 어찌 사람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 나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나에게 목숨빚을 진 자들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여 일단 내 사람이 된 자들은 나를 떠날 수 없었다.

더우기 나는 명석한 머리와 탁월한 판단력을 지녔기에, 나에게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조차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이토록 원대한 능력을 주셨으면서, 동시에 여인이며 대원신통의 후예라는 운명의 족쇄를 채워주신 하늘을 어찌 얄궂다 하지 않겠느냐? 너를 만나면서 이미 하늘의 뜻에 항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네 어미는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결정했다. 돌이킬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내 첫번째 꿈이 그렇게 부서져내렸듯이, 나 자신 또한 찬란하게 부서지면 그뿐이었다.


비담, 내 아가... 사다함을 진정으로 연모했던 내가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그러나 너의 꿈 또한 나의 꿈처럼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너도 사랑을 딛고 일어설 수는 없음을, 오직 분노를 딛고 일어서서 운명에 항거하는 삶 외에는 선택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모진 운명을 순하게 받아들이기에는 가엾은 내 아가, 너는 나를 너무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있는 힘을 다해 뛰어드는 게다. 그 운명 안에서 더 모질고 강한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도 너에게 가장 모질게 대했다. 네 안에서 분노가 거칠게 폭발할수록 너는 더욱 강해질테니까 말이다. 어미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혹시 알겠느냐? 어미의 뒤를 이어 자식이 끝없이 운명에 저항하다 보면, 하늘이 우리 모자(母子)의 처절한 삶을 가엾게 여기시어 모진 운명의 족쇄를 풀어주실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불가능한 꿈에도 희망은 있는 법이니, 그 희망의 한 가닥 끈을 놓지 말아라. 네 어미가 평생, 마지막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비담, 내 아가...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해라. 너를 버린 어미를 원망하여라. 네 사랑을 잃게 하고, 그 사랑에 칼을 겨누도록 만든 이 어미를 독하게 원망하여라. 이것이 모진 숙명과 더불어 어미가 너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니 아들아, 네가 강해지고 독해질수록 어미를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이젠 알겠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말이다. 


 * 이 블로그에 게시된 '선덕여왕' 관련 모든 편지글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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