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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비담에게 보내는 여왕의 편지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선덕여왕' 비담에게 보내는 여왕의 편지

빛무리~ 2009. 12. 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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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다.
비담, 너는 모른다. 너는 왕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지금도 어미 잃은 송아지처럼 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어찌 나를 사랑했단 말이냐. 한 번도 너를 바라본 적 없는 나를, 너는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더란 말이냐. 평범한 여인에게는 온 세상일 수도 있었을 너의 가슴이, 왕인 나에게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을, 너는 하필 그 가슴을 나에게만 열었더란 말이냐.

왕의 길을 가려고 유신의 손을 뿌리친 순간부터 나는 사람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었다. 유신도, 춘추도, 너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다.
왕이란 그런 것이다. 정치라는 냉혹한 장기판에서, 이용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 또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왕이 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한 사람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니라.

네가 미실의 버려진 아들임을 알았을 때, 내 마음속에도 작은 물결처럼 연민은 일었었다. 나 또한 부왕에게서 버려진 자식이었으니까... 버려졌으면서도 그 핏줄을 외면하지 못하고 내 운명을 걸어야만 했으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번뇌하던 시간들을 나도 겪었으니까... 네가 내 눈에서 읽은 애틋함이 거짓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를 품에 안고 위로할 때, 내 머리를 지배한 것은 네가 아니라 네 어미였다. 내가 한없이 증오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던 미실...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갈무리하기에 나는 아직도 힘이 부족했고, 그래서 새롭고도 강력한 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말은 이미 내 품안에 들어와 울고 있었다.


너는 모른다. 비담, 너는 지금도 모른다. 네가 선택한 여인이 왕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직 너만은 지금도 모른다. 영특한 머리는 어미를 닮았으되, 그 어리석은 마음은 누구를 닮았더란 말이냐? 독하고 매몰찬 수단은 네 어미의 것이로되, 그 뜨거운 가슴은 누구의 것이었더냐? 어미를 닮지 않은 그 어리석은 마음과 뜨거운 가슴이 네 발목을 묶어 내 손에 쥐어 주는구나.



너는 어느 날,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나 오랜 세월 동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네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가면서까지 힘써 나를 도왔으나, 왕에게 있어 믿음이란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내 손에 장기판의 말을 쥐고 있으니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내 손을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말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믿는다는 말에 너는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지만, 정작 내가 믿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다.

미실의 아들, 너 비담은 귀족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있건만, 옆을 볼 줄 모르는 노루처럼 나만을 보며 따라오는구나. 내 눈물을 보며 덩달아 글썽이는 네 눈이 어처구니없이 맑아서, 문득 생각지도 않은 가슴이 저려오지만, 나는 왕이다. 왕일 뿐이다.


사내로 태어나 수많은 여인 중에 하필 나를 사랑했단 말이냐. 이토록 뜨거운 가슴으로 하필 나를 사랑했단 말이냐. 미안함도 고마움도 잿더미처럼 삭여버리고, 너를 안은 이 가슴에 찬바람만 불어가는 나를......... 이 못난 아이야, 너는 지금도 사랑한다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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