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과 영화와 연극 (62)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윤제균 감독의 신작영화 '국제시장'은 대중의 열광 속에 나날이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글깨나 쓴다는 칼럼니스트들에게는 큰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견해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악평들이 난무하며, 심지어 역사 왜곡이라든가 명배우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든가 하는 극단적 발언까지 튀어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비판이 타당할까? 정치적 견해를 첨가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인생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영화는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한국의 현대사를 순차적으로 다루면서도 4.19라든가 5.16 등 정치적 사건을 전혀 다루지 않고 주인공의 정치적 사상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윤제균 감독은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필자의 견해부터 밝힌다면 윤제균 감독의 그 답변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 칼릴 지브란 최근 드라마 '불새..
젊은 수도자에게 고뇌하는 너의 가슴속에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마당과 모든 숲 모든 집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목적지에서 모든 여행길에서 모든 순례길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마음속의 광명뿐 아니라 세상의 빛줄기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온갖 색깔과 어둠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광활한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도 진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 스와미 묵타난다 (20세기 인도의 성자)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mirkhan32/90176515793 어쩌면 세상과 타인의 다양한 모습들을 수용하기 힘든 것은 아직도..
너를 생각하는 것이나의 일생이었지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나의 일생이었지 - 정채봉 사진 출처 : http://cafe.naver.com/ladyskin/32989 요즘 드라마는 어째서 한결같이 폭망이고 개봉한 영화 중에 끌리는 것도 없고 예능도 별로 재미가 없다. 매일 글을 쓰고 싶은데 당최 할 얘기가 없다. 심심해서 볼거리를 찾다가 2년 전에 방송했던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2'를 단 이틀만에 13회나 정주행했다. 16회까지 다 보고 나면 할 얘기가 좀 있을 것도 같다. '연애의 발견' 때문에 정현정 작가와 배우 정유미에게 관심이 생겨서 보게 된 것인데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사실 '연애의 발견'도..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 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천상병 시인의 '나무'는 참 간략하고도 쉬운 詩다. 평소 문학을 즐기지 않고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그 뜻을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억울하고도 참담하고도 가난했던 시인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고 읽는다면 그 속에서도 한없이 따뜻한 긍정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시는 더욱 가슴 속 깊이 와 ..
물론 모든 여성 관객에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성 못지 않게 액션과 전투씬을 즐기고, 배우 최민식을 열렬히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명량'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평소 액션이나 전투씬을 즐기지 않고, 배우 최민식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가 '명량'이었다. 일단 전투씬이 너무 길다.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투씬은 제법 장관을 이루어 상당한 제작비와 공을 들였음이 느껴지지만, 신기한 눈으로 감탄하며 지켜보는 것은 처음 몇 분에 지나지 않고 후반에는 무척 지루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드라마적 스토리를 즐기기 때문에 전투씬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스토리의 일부로 인식할 뿐인데, '명량'은 대략 70~80% 가량이 해상 전투씬으로 채워져..
축하합니다 정호승 이 봄날에 꽃으로 피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이 겨울날에 눈으로 내리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괜찮아요, 손 드세요, 손 들어보세요 아, 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신 분 손 드셨군요 바위에 씨 뿌리다가 지치신 분 손 드셨군요 첫 눈을 기다리다가 서서 죽으신 분도 손 드셨군요 네, 네, 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실패를 축하합니다 천국이 없어 예수가 울고 있는 오늘밤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희망 없이 열심히 살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 축하합니다 사진 출처 : http://cafe.naver.com/chusunghun/14331 천국이 없어 예수가 울고 있는 오늘밤에는 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갔을까? 고통을 잘 견뎌내는 것은 그 자체로..
윤종빈 감독이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에 너무 심취했던 것일까? 조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캐릭터와 전체적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의 비극과 장중함에 비한다면 다소 가볍게 처리된 느낌도 있다. 하지만 '군도:민란의 시대'(이하 '군도')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초(民草) 들의 한(恨)이라면 그 메시지는 충분히 어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주인공 도치(하정우)의 캐릭터가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에 표현이 극대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치는 원래 '돌무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쇠백정이었다. 배운 거라고는 고기써는 칼질뿐이요, 가진 거라고는 황소같은 힘과 돌처럼 단단한 육체뿐이다. 복잡한 생각이나 고민 따위를 할 줄 아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 류시화 '목련' 류시화 시인의 '목련'... 내가 꽤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품이다. 대략 20대 초중반쯤이 아니었나 싶다. 파릇파릇한 그 나..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내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 주소서. 내 신체의 고통은 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