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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와 연극

'명량' 여성 관객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

빛무리~ 2014. 7. 3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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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여성 관객에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성 못지 않게 액션과 전투씬을 즐기고, 배우 최민식을 열렬히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명량'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평소 액션이나 전투씬을 즐기지 않고, 배우 최민식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영화가 '명량'이었다.

 

 

일단 전투씬이 너무 길다.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투씬은 제법 장관을 이루어 상당한 제작비와 공을 들였음이 느껴지지만, 신기한 눈으로 감탄하며 지켜보는 것은 처음 몇 분에 지나지 않고 후반에는 무척 지루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드라마적 스토리를 즐기기 때문에 전투씬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스토리의 일부로 인식할 뿐인데, '명량'은 대략 70~80% 가량이 해상 전투씬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명량'에는 스토리라 할만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본 스토리는 역사 속에 밝혀져 있지만, 그래도 새삼 영화로 제작되었으니 무언가 새로운 해석과 픽션을 첨가하여 식상함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거라 나는 기대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명량'은 그렇게 기획된 영화가 아니었다.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오직 실감나는 해상 전투씬과 배우 최민식이 표현하는 성웅 이순신의 캐릭터, 두 가지뿐이었다.

 

 

나와 함께 관람한 남편은 영화가 매우 좋았노라고 평했다. 내게는 참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전투씬도 남자라서 그런지 볼만했다 하였고, 더욱이 남편은 배우 최민식의 팬이기 때문에 이순신의 캐릭터에도 깊이 몰입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최민식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4년 전 '악마를 보았다'를 관람한 후 지독한 충격을 받아 수일간 두통에 시달렸던 트라우마가 '명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 상황일 뿐 최민식에게는 일말의 책임이 없다. 배우로서 악역을 맡아 최선을 다해 실감나게 연기했을 뿐인데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지만 최민식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자꾸만 '악마'의 이미지가 떠오르니, 그 사람을 선량한 영웅 이순신으로 인식하며 몰입하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이순신 장군은 무관이면서도 섬세한 문관의 기질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던데, 최민식에 의해 표현된 이순신은 뼛속까지 무관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대패한 후 이순신이 다시 지휘권을 잡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12척의 배와 의기소침한 소수의 군사들뿐이었다.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수군을 해체하여 권율이 이끄는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소신이 살아있는 한, 적들은 결코 조선 수군을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결연한 어조로 상소를 올린 후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이순신 장군은 아들 이회와의 대화중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쫓아야 하고, 그 충은 백성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러자 이회가 묻는다.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옵니까? 백성은 제 살 길만 찾을 뿐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요?" 이순신은 굳건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 장면이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이순신보다 이회의 대사가 놀라워서였다. 백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 정말 그것이 당시 양반들의 사상이었을까? 제 살 길만 찾는 것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한 일이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임금도 없는 것인데?

 

 

당시에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반들이 보기에 일반 백성이나 천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비슷한 소유물로 느껴졌을 터, 그들의 목숨을 귀히 여겼을 리가 없지 않은가? 죽는 자가 있으면 새로이 태어나는 자가 있어 그 자리를 채우니 아쉬울 것도 없었으리라.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오직 임금이요, 전쟁에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도 오직 임금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영웅 이순신은 그 당시부터 이미 백성의 소중한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330척 대 12척의 싸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순신이 힘껏 독려했으나 군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등불에 날아든 나방처럼 죽게 될 것을 알면서 용감히 싸움에 뛰어들 만큼 강한 정신력이란 사실 인간에게 요구하기 어려운 덕목이었다. 이순신의 대장선을 제외한 11척의 배는 슬금슬금 뒤쪽으로 노를 저어 물러났고, 이순신은 거의 홀로 330척의 적선을 마주했다. 그런데도 적군은 이순신의 당당한 위엄에 겁을 먹고 주춤거리니 "소신이 살아있는 한, 적들은 결코 조선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했던 이순신의 호언장담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큰 규모의 해상 전투씬이 길게 이어진 후, 이순신은 놀라운 승리의 기적을 이루어낸다. 장군이 백성을 귀히 여긴 만큼 백성들도 장군을 따랐고, 백성들이 목숨 걸고 합심하여 도왔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승리였다. 역사 속 기록에 따르면 명량대첩의 결과 일본군은 30여척의 배를 격침당하고 18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퇴했으나, 조선군은 단 한 척의 배도 격침당하지 않았고 십여 명 내외의 피해자만이 발생했다고 한다.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기적의 대승이었다.

 

주연배우 최민식 외에도 출연진은 매우 탄탄하다. 류승룡, 조진웅, 진구, 이정현, 김명곤, 노민우, 김태훈, 권율, 오타니 료헤이, 이승준 등 연기도 잘하고 인기도 높은 배우들이 깨알같이 포진해 있다. 그런데 최민식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의 역할과 분량은 모두 엑스트라 수준을 면치 못하니, 그 정도 이름값을 지닌 배우들이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심지어 공동 주연이라는 류승룡과 조진웅마저 그 존재감이 턱없이 희박하니, 최민식과 류승룡의 카리스마 대결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영화의 배경이 된 명량해협 울돌목은 바로 얼마 전 세월호 침몰 참사가 있었던 진도 앞바다에 위치해 있다. 맹골수로보다 더욱 유속이 빠른 곳이라는데, 줄곧 거칠게 회오리치는 검푸른 바닷물은 가슴이 떨리도록 무섭고 침통했다. 400년 전 그 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330척의 적선을 물리쳐 백성들의 귀한 목숨을 지켜냈는데... 민주주의와 첨단과학의 시대인 오늘날, 전쟁 상황도 아닌데 수백 명의 죄없는 백성이 바로 그 곳에 어이없이 수장된 것을 생각하니 참 기막히고도 원통한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나는 '명량'을 전형적인 '남자 영화'라 표현하고 싶다. 이어서 '한산'과 '노량'까지 제작될 예정이라는데, 나는 이 시리즈를 더 이상 볼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남편은 혼자서라도 극장에 가서 보겠단다. 이런 대작은 큰 화면으로 봐줄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였다. 함께 영화 관람을 즐겨 하는 우리 부부의 감상평이 이토록 극명히 갈리기는 처음이다. 개봉 후 37시간만에 전국 관객수는 벌써 100만을 훌쩍 넘겨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는데 앞으로는 과연 어떤 입소문이 돌지, 흥행이 계속 이어질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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