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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민란의 시대' 아름다운 액션 속에 뜨거운 눈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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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민란의 시대' 아름다운 액션 속에 뜨거운 눈물

빛무리~ 2014. 7. 2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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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빈 감독이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에 너무 심취했던 것일까? 조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캐릭터와 전체적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의 비극과 장중함에 비한다면 다소 가볍게 처리된 느낌도 있다. 하지만 '군도:민란의 시대'(이하 '군도')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초(民草) 들의 한(恨)이라면 그 메시지는 충분히 어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주인공 도치(하정우)의 캐릭터가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에 표현이 극대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치는 원래 '돌무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쇠백정이었다. 배운 거라고는 고기써는 칼질뿐이요, 가진 거라고는 황소같은 힘과 돌처럼 단단한 육체뿐이다. 복잡한 생각이나 고민 따위를 할 줄 아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돌무치의 어머니(김해숙)와 여동생(한예리)이 갑자기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벌레처럼 짓밟히고 만 것이다. 새카맣게 타죽은 어머니와 여동생의 시체를 보는 순간, 단순무식한 돌무치의 머리와 가슴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사실상 '군도'의 중심 스토리는 주인공 도치와 악역 조윤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식의 거창한(혹은 숭고한) 목표의식이 아니라, 그저 어머니와 누이를 억울하게 잃은 청년이 너무나도 강한 원수를 상대로 끝없이 도전하며 벌이는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이 공감대 형성에 도움을 준다. 따지고 보면 그 당시 민란을 일으켰던 백성들 중 깊은 고민과 사색을 할 줄 아는 인물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대부분은 도치처럼 단순한 이유로 도적이 되었을 것이다.

 

 

시대 배경은 조선 철종 13년, 갖가지 자연재해와 기근에 관의 횡포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던 시절이다. 풍양조씨 세도가의 서자로 태어난 조윤은 평생 부친 조대감(송영창)의 인정을 받고자 발버둥쳤으나, 조대감은 뒤늦게 얻은 적자 조서인(이다윗)만을 아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조서인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윤은 부친의 유일한 아들로 인정받을 기대에 부풀었으나, 임신중인 조서인의 처(김꽃비)가 걸림돌이 되었다. 만약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조대감은 적통의 손자를 얻게 되므로, 조윤의 처지는 여전히 낙동강 오리알에 그칠 것이었다. 이에 조윤은 만삭의 제수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 과정 중에 어리버리한 돌무치가 휘말리면서 그의 가족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돌무치는 당장 조윤의 집으로 쳐들어가 황소같은 힘으로 하인들을 때려 눕히지만, 부채 한 자루를 들고 가냘픈 모습으로 등장한 조윤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만다. 비록 서자의 신분 때문에 출세길이 막혔지만, 조윤은 당대 최고의 무관으로서 절륜한 무예 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천부적 재능도 있겠으나 부친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을 것이다. 성난 짐승처럼 덤벼드는 돌무치를 부채 한 자루로 가볍게 제압하는 조윤의 솜씨와 맵시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자신의 목덜미를 짓밟은 채 우아한 자태로 햇빛 속에 서 있던 조윤의 모습은 이후 돌무치가 무예 수련을 거듭할 때 그의 머릿속에 복수의 표적으로 줄곧 생생히 떠오르게 된다.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돌무치는 출중한 신체적 능력 덕분에 지리산 의적단 '추설'의 일원으로 스카웃(?)되고, 땡추(이경영)로부터 '도치'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빡빡 민머리로 변신하고 절치부심 무예 수련에 열중하는 도치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산채 식구들의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속세에서는 부자들의 소작농으로, 양반들의 노비로, 온갖 노동력과 기본 양식까지 탈취당하며 지옥같은 삶을 이어나가던 사람들일텐데, 적어도 지리산 깊은 자락에 위치한 '추설'의 산채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백성들이었다. 비록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짧고도 불안한 행복이지만, '도적떼'라 비웃는 세간의 목소리마저 차단된 그 곳은 완벽한 유토피아였다.

 

 

대호(이성민), 태기(조진웅), 천보(마동석), 마향(윤지혜) 등 산채 식구들이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꿀재미를 더한다. 저마다 기라성같은 연기파 배우들인데 각각의 비중이 너무 적어서 아쉬운 느낌은 있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모두 단순하기 때문에 적은 분량으로도 효과적 표현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는 복잡다단한 캐릭터가 너무 많다 보니, 반작용으로 단순한 캐릭터의 산뜻한 매력이 극대화된 것 같다. 오히려 고뇌하는 지식인 캐릭터에 가까운 땡추의 모습은 식상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내가 특히 주목한 캐릭터는 활쏘기의 달인인 여걸 '마향'이었는데, 윤지혜라는 여배우의 특별한 외모와 연기력이 없었다면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매력 만점의 인물이었다.

 

 

조윤은 당대의 탐관오리였던 제 부친보다 더 악랄한 수법으로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는데, 나중에 보면 그 모든 악행의 이유가 부친의 인정과 애정을 갈구하는 비뚤어진 아이같은 욕망이었음이 드러난다. 부친 조대감이 이미 조선 제일의 대부호였음에도, 더 많은 재산을 착취해서 바치면 조금이나마 따뜻한 시선으로 자기를 봐줄까 하는 마음이었다. 감독이 지극한 연민의 시선으로 조윤을 바라보고 있으니 관객 역시 그를 미워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강동원의 눈부신 자태가 빛깔 고운 도포자락에 휩싸여 긴 장검과 더불어 춤추고 있음에랴!

 

 

도치와 조윤은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4~5번에 걸쳐 대결을 하게 되는데, 산채에 들어간 후 무예 실력이 일취월장하였음에도 도치는 항상 패배하고 만다. '군도'라는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면 바로 '액션'이다. 평소 액션씬을 지루해하고 싫어하는 내가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초집중 모드로 관람했다면 알만하지 않은가? 단지 강동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친 짐승같고 야차같은 하정우의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혹자들은 강동원이 열연하는 조윤의 매력에 홀릭한 나머지 악역임에도 그가 승리하기를 바랐을지 모르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슬픈 사연의 뒷받침만으로 용서하기에는 조윤의 악행과 야비함이 지나쳤다.

 

 

감독이 조윤 캐릭터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최후의 일전에서 드러난다. 상처 때문에 냉혹하고 야비해졌지만 깊은 내면에는 아직도 여린 속살을 숨기고 있는 악역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생뚱맞은 설정의 무리수까지 두었던 것이다. (조윤은 그토록 없애고 싶어했던 갓난아기 조카를 왜 살려 두었으며, 위험 천만한 싸움터에 왜 안고 나왔을까?) 윤종빈 감독은 인터뷰에서 "선인과 악인의 구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인물 각각의 주제와 사연을 그리되, 하이라이트에 이르러서는 선악의 대결이 아닌 자기 안의 번뇌와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글쎄, 의도가 썩 훌륭히 형상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 자체는 높이 평가될만하다. 철저히 가해자인 듯 싶은 조윤도 사실은 피해자임을, 어쩌면 이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는 싸움도 그와 같은 것임을, 버림받고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임을 표현하려 한 것이니 말이다. 풀어 말하자면 세상에 가장 흔한 다툼은 진정한 강자와 약자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약자이되 다른 길을 선택한 자들끼리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써놓고 보니 조금 어렵다. 나처럼 뼈저린 경험을 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저 막연할 뿐 깊이 와닿지 않을 것도 같다. 아무튼 그래서 '군도'의 결말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상처받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총검을 겨누며 푸른 대나무숲은 붉은 피로 물들어간다. 현란하고 아름다운 액션 속에 뜨거운 눈물을 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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