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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 진정 소원할 것은 무엇인가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 진정 소원할 것은 무엇인가

빛무리~ 2014. 6. 1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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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내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 주소서.
내 신체의 고통은 해마다 늘어나고
그것들에 대해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기꺼이 들어 줄 은혜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적어도 인내심을 갖고 참아 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기억력을 좋게 해 주십사고 감히 청할 순 없사오나 제게 겸손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부딪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게 하소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을 주소서.

 

적당히 착하게 해 주소서. 저는
성인까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성인들은 더불어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그렇더라도 심술궂은 늙은이는
마귀의 자랑거리가 될 뿐이니
그렇게는 되지 않게 해 주소서.

 

제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아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作, '기도하는 손'(Betende Hände)

 

오늘은 제목 그대로 17세기 수녀가 썼다고만 전해지는 작자 미상의 잠언시 한 편을 소개한다.
지극히 종교적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은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다.

 

화자(話者)인 수녀는 기도의 첫 단계에서 '늙음'에 대한 두려움을 담담히 표현하고 있다.
세속의 화려한 젊음을 만끽해 온 사람들뿐 아니라
평생 검은 수도복 차림으로 절제와 극기와 희생 속에 살아온 수녀에게도

늙음이란 두려운 것이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살아있는 한 절대 피할 수 없는 반갑잖은 손님.
아니, 손님이라 표현하고 싶지만 그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진다.

 

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만인 공통의 것이지만, 수녀의 기도는 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꽃다운 얼굴에 주름이 질까봐, 허리에 군살이 붙을까봐, 
주변을 맴돌던 남자들이 하나 둘씩 떠나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험이 축적되면서 행여나 말이 많아질까봐
시도 때도 없이 젊은이들에게 잔소리와 충고를 늘어놓게 될까봐 수녀는 두려워한다.

 

쇠약해지는 몸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타인에게 수시로 하소연하며 민폐를 끼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젊은이들에게 무시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행여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고집불통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수녀의 간절한 소원은 결코 늙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친절하고 사려깊은 노인,
늙음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순하게 인내할 줄 아는 노인,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나의 고통을 잊을 줄 아는 노인,
오만한 고집쟁이가 아니라, 젊음 앞에서도 겸손할 줄 아는 노인,
넉넉한 마음으로 늘 칭찬할 줄 아는 노인,
남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언뜻 평범한 것 같지만, 거듭 읽고 되새길수록 이 얼마나 놀라운 비범함인가?

 

나이가 들면서 고집은 세어지고, 자기 주장에 대한 확신 또한 굳어진다.
스스로 겪은 일과 아는 것이 많다는 생각에 말도 많아진다.
아프니까 서럽고 외로우니까 또 서러워서 하소연도 많아진다.
젊음의 시행착오를 칭찬하며 격려하기보다는 지적하며 바로잡고 싶어진다.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늙음의 과정이라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17세기 수녀는 그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평온한 노년의 단계에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다.

 

수녀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다.
자신의 늙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늙은 자신이 타인들에게 미치게 될 영향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 소원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영웅이 되는 것도 좋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좋다.

 

그러나 먼 곳을 바라보며 큰 소망을 품기보다
오직 나의 말 한 마디,
나의 생각 한 자락을 바꿀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너무 조촐한 소원일까?

 

어두웠던 마음이 아주 천천히 밝아져 오고
날카롭던 눈빛이 순해진다면
신중하게 입을 열어 전하는 말 한 마디에도
내 삶의 가치를 담을 수 있을텐데

 

수많은 타인을 위로하지는 못했어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만 따스히 다독일 수 있었다면
최후의 자리에서 결코 허망함을 느끼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특별히 잘나지도 못한 나는 진정 무엇을 소원해야 할까?
깊이 생각케 하는 17세기 수녀의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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