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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그는 /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詩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정호승 - 그는 /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詩

빛무리~ 2014. 6. 16.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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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 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 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정호승 '그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의 '그는'이다.
왠지 읽을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파와서
아주 가끔씩만 펼쳐보는 시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인데
왜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일 게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누군가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것이다.
물론 가여워하는 그 감정 또한 사랑임에는 분명하다.

 

감성에 따라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면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기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느껴지는 자괴감.

 

정호승 시인에게서도 그와 같은 면을 엿볼 수 있다.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홀로 죽어가는 사람...
아무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그 주검을 씻어주는 이도
밤새 촛불을 켜고 애도의 노래를 불러주는 이도 없는 사람...

 

시인이 노래하는 話者는 그렇게 더럽고 초라하여
모두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하는 사람이다.
극도의 외로움과 자괴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최후의 구원은 역시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더럽고 초라해도
그 곁에 누워 잠이 들고 밤새 그의 주검을 씻어내리는 사랑

 

매듭 없는 원을 그리듯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기다려주는 그 사랑을 통해
화자는 비로소 자괴감의 올무에서 벗어난다.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읽어 보니
이 작품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시다.

 

여러분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시라.
어쩌면 일상에 지쳐서 잊혀졌을 뿐
지금 내 곁에도 '그'가 살아 숨쉬고 있지 않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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