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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역시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게 '미스터 션샤인'에는 재치있고 맛갈스런 명대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 중에도 최고의 명대사를 꼽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9회에서 고애신(김태리)의 입을 통해 표현된 "나는 불꽃이오"라는 대사를 선택하고 싶다.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사대부 여인들은 다들 그리 살던데"라는 유진초이(이병헌)의 말에 고애신은 담담히 미소지으며 그렇게 답했던 것이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죽음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의병으로서의 삶을 그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글프게도 대부분 존재의 흥망성쇠는 힘의 논리로 좌우된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과는 별 상관이 없다. 국가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옳고 선한 것이라 할지라..
제목 : 쓸데있는 신비한 잡학사전 저자 : 레이 해밀턴 역자 : 이종호 발행 : 도서출판 도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수천 가지의 흥미로운 잡담거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레이 해밀턴의 엄청나게 다양하고도 방대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지구, 역사, 문화, 수학, 과학, 우주, 정치, 스포츠, 연예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만한 단편적인 지식들이 각 분야마다 뺴곡히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가볍고 유쾌하며 신비하다. 이 책에 담긴 지식들 중 특별히 관심있는 몇 가지만 기억하더라도, 만약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적절한 타이밍을 포착할 수 있다면, 순식간에 감탄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친구들의 시..
정말 오랜만에 소설 한 권을 아주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토록 독서를 좋아했건만, 어느 순간 인터넷과 영상 자료들이 전해주는 자극적인 재미에 빠져들면서 독서의 은근한 재미를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고 느꼈던 작품들은 이제 너무 딱딱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졌고, 새로 나오는 작품들 중 대다수는 가볍거나 유치하게 느껴졌다. 아, 물론 이것은 작품들의 문제라기보다 이미 독서에 흥미를 잃어버린 나의 내면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심히 집어든 소설 '정막개'는 이런 나의 심드렁한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고, 나는 엄청난 속도와 집중력으로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삽시간에 독파했다.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짜릿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이 ..
혹시라도 조민기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피해자가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저지른 죄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또한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일 뿐이다. 혹시라도 어떤 몰지각한 자가 있어 그의 죽음을 이유로 당신을 비난한다 해도 전혀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세상 모든 범죄의 피해자들이 혹시라도 가해자가 자살할까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어야 한단 말인가? 죄는 밝혀져야 한다. 그 결과가 설령 죽음일지라도, 혹은 그보다 더한 것일지라도. 그는 끝내 뉘우침도 진실한 사과도 없이,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다. (유서가 되어버린 손편지 내용 중에 "지난 7년 고되고 어려운 배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사회 권력자들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현직 검찰 내부의 성추행을 과감한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낸 서지현 검사의 폭로는 이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동안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던 수많은 성추행과 성폭력들이, 피해 여성들의 용기에 힘입어 잇달아 세상에 폭로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고발당한 가해자들은 모두 막강한 명성과 권력을 지닌 사회 저명인사들이다. 정치, 문화, 연예계는 물론 종교계까지도, 그 어느 곳에도 성역은 없었다. 권력의 이름으로, 절제 못한 욕망을 핑계로, 약자들을 짓밟고 죄책감조차 없이 살아온 범죄자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서지현 검사에게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너의 등짝에 스매싱' 홈페이지에는 "인생의 후반부에서 한 순간에 몰락해 버린 베이비부머 세대 가장의 눈물겨운 사돈살이, 또 애석하리만큼 큰 시련을 맞게 되는 영이 맑은 한 청춘이 꿈과 사랑에 대해 눈뜨는 웃픈 성장기를 담은 시트콤" 이라는 프로그램 소개가 나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현재 가장 불쌍한 처지로 사돈살이를 하고 있는 박영규와 박현경(엄현경) 부녀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모두가 깨알 재미를 주는 소중한 캐릭터들이지만. 그런데 아무리 현재 처지가 난감하다 해도 나는 박영규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작품들을 살펴볼 때, 김병욱(스텐레스김)은 중년 이후 캐릭터들에게 아무리 큰 시련을 주었더라도 결국은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감자별2013QR3' 이후 갑작스런 김병욱 감독의 은퇴 선언은 가히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작품이 방송되는 동안에는 온 마음을 기울여 열렬히 시청하고, 한 작품이 끝나면 또 그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오려나 학수고대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온 나에게, 이제 더 이상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공존하는 그의 시트콤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단순히 아쉽다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상실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상업주의 만연한 이 시대에,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과 신념을 고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겹고도 외로운 일일 터였다. 어쩌면 이제 지칠 때도 되었다 싶었고, 만약에라도 험한 방송가에서 더 버티다가 그만의 고유한 색깔이 변질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쯤에서 영..
윤지호(정소민)와 남세희(이민기)의 관계는 철저한 남남으로서의 계약 관계였다. 세입자와 집주인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철저히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서 성립된 상호협의하의 비밀 결혼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짧은 생각에는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완전한 남남으로서, 객체로서의 상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의 이유가 되었다. 임신한 여자친구들 데리고 들이닥친 남동생 때문에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윤지호에게는 편히 한 몸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하우스푸어인 남세희에게는 다달이 월세를 납부하면서 고양이와 집 관리도 해줄 수 있는 깔끔하고 성실한 세입자가 필요했다. 이렇게 윤지호와 남세희는 서로가 생활의 필요충분조건을 채워주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필요충..
나 역시 동물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알레르기 때문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지는 못하지만 늘 부러워하며 로망처럼 여겨 온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반려견이 이웃을 물어서 죽게 만들었을 때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하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고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정당한 수습을 해야 한다. 단순히 '사과'하고 '용서'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죽.었.다. 이것은 엄연한 과실치사다. 제대로 법적인 절차를 밟아 대중이 수긍할 수 있는 처벌을 받고 그 결과를 세상에 널리 공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을 한 번 사람을 물어 상처를 입힌 개는 '내가 사람을 물어 제압했다' 는 인식을 갖게 되어, 차후로도 ..
내 블로그의 오랜 독자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고질적인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고생해 왔다. 전신마취 수술을 비롯하여 안 써 본 약과 치료 방법이 없었으나 결국은 4~5년 전부터 후각을 잃었다. 비염이 악화되며 천식이 발병했고, 환절기가 되면 종종 콧속 깊은 곳부터 심한 통증을 동반하는 인후염이 발생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현재는 그저 코의 통증과 막힘이 지나치지만 않다면, 어쨌든 고통 없이 숨만 쉴 수 있다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최근 집을 정리하고 이사하면서 피곤했던 데다가 환절기가 겹치니 또 다시 인후염과 천식이 재발했다. 속이 뒤집힐 듯한 기침에 시달리고 짙은 가래를 수없이 뱉어내며 며칠간 독한 약을 먹었다. 이제 겨우 좀 진정이 된 듯한데 아직은 완쾌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