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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처음이라' 철저한 객관화가 불러온 그들의 사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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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처음이라' 철저한 객관화가 불러온 그들의 사랑

빛무리~ 2017.11.14 21:57

윤지호(정소민)와 남세희(이민기)의 관계는 철저한 남남으로서의 계약 관계였다. 세입자와 집주인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철저히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서 성립된 상호협의하의 비밀 결혼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짧은 생각에는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완전한 남남으로서, 객체로서의 상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의 이유가 되었다. 

임신한 여자친구들 데리고 들이닥친 남동생 때문에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윤지호에게는 편히 한 몸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하우스푸어인 남세희에게는 다달이 월세를 납부하면서 고양이와 집 관리도 해줄 수 있는 깔끔하고 성실한 세입자가 필요했다. 이렇게 윤지호와 남세희는 서로가 생활의 필요충분조건을 채워주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필요충분조건까지도 서로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그들은 과감히 계약결혼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혼은 그 둘이서만 합의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희의 집안에서는 다짜고짜 제사가 있다면서 새며느리인 지호를 불러다가 무려 6시간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을 시킨다. 이건 계약에 없는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 진짜 부부관계에서는 이것을 '갚아야 될 빚'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기에, 그 부당한 노동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희는 실질적으로 아무 관계 없는 남남 사이에 큰 실례를 범했다고 생각하며 그 빚을 갚으려 한다. 


처음에 세희가 지호에게 돈봉투를 건네주며 "부당한 노동의 대가는 이걸로 대신하죠." 라고 말했을 때, 지호의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차올랐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호가 이미 세희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어떤 핑계든 둘러대고 제사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호는 '마음'을 주었지만 그건 일방적인 거였다. 


그렇다면 세희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미 그의 마음도 수차례 증명된 바가 있다. 지호가 위험에 처했을 때 애타게 찾아헤맨 그의 시간이 얼마였으며, 또한 복남이 지호에게 위해를 가할까봐 막아서며 깨부순 오토바이의 수리비는 얼마였을까? 평소 한푼 두푼을 아끼는 그의 생활 패턴으로 보았을 때, 윤지호를 보호하려다가 깨진 돈은 거의 심장을 깨부수는 수준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다가서는 윤지호에 비해 남세희의 태도는 냉랭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 경험 없이 사랑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만 빠져 있는 윤지호와 달리, 남세희는 과거에 깊은 사랑을 해보았고 그 사랑이 처참하게 깨졌을 때의 고통마저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남세희는 모든 꿈을 잃어버렸다. 


이제 겨우 30대 중반의 남자가, 건강하고 잘생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있는 젊은 남자가, 고작 원하는 꿈이라는 게, 지금 이 상태가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라니, 이렇게 계속 조용히 살다가 내 집에서 조용히 혼자 눈 감는 게 소원이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다. 그의 독단적인 아버지와 지나간 사랑은, 그의 가슴을 할퀴어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남세희는 윤지호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첫째로는 움츠러든 자신감 때문이고, 둘째로는 여전한 아버지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씩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더욱 철벽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를 받은 적 없기에 더욱 용감하기만 한 지호의 저돌적인 다가섬은 결국 세희의 철벽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른다.조금은 뻔뻔해야 가능한 일이다.



세희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한 일이니, 원칙적으로 그 책임을 세희에게 지울 수는 없다. 애초 세희가 제시한 것처럼, 부당 노동의 대가로 돈이나 받으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철모르고 당돌한 지호는 똑같이 노동으로 갚을 것을 제안한다. 자신의 짝사랑이 처참히 무시당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사실은 부당한 조건이었다. 지호의 제사 노동은 일단 세희가 시킨 것이 아니었고, 거절할 기회가 있었으며, 주거 지역에서 멀지 않은 서울에서의 일이었고, 시골 집 맏딸인 지호가 늘상 해오던 가사일이었다. 그런데 지호는 머나먼 남해의 친정에서 벌어지는 김장 노동에 세희를 등 떠밀어 보냈으며, 세희는 난생 처음 접해보는 벅찬 육체노동에 대책없이 내몰렸다.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세희는 뼛속까지 공평한 사람이었고, 스스로 얼마나 깨달았는지는 모르나 윤지호를 향한 애틋함과 측은지심과 은근한 사랑에 벌써 꽤나 깊이 몰입되어 있었다. 홧김에 제시한 그녀의 조건을 두말없이 받아들인 세희는 생전 처음 월차까지 내면서 남해에 있는 지호의 친정으로 달려가 그 낯선 곳에서 엄청난 노동의 김장을 돕게 된다. 


계약 결혼을 알 리 없는 지호의 친정 부모는 사위의 방문에 기뻐하지만, 김장을 하러 왔다는 말에는 반응이 엇갈린다. "나와 겸상해서 낮술이나 마시다가, 김장 끝나면 수육이나 먹고 가라"는 장인과 달리 장모(김선영)는 "일하기 편한 옷이라도 갖다 주마" 하면서 사위의 김장 노동을 적극 찬성했던 것이다. 조용하지만 통쾌한 여자의 반란이었다. 


지호 엄마는 딸이 자기처럼 사는 게 싫었다. 시집이라고 가서 남의 집 가사 노동에 시달리며, 배운 공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면서 그러고 살까봐 늘 걱정이었다. 지호가 세희의 집에 불려가 제삿상을 차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지호 엄마의 표정은 싹 변하면서 일꾼 부려먹기 모드로 바뀌었다. 내 딸이 겪은 만큼 너도 똑같이 해봐라, 하는 그런 마음. 


생전 처음 김장을 해보는 세희의 고충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무려 100포기나 되는 배추를 김치로 만들면서 팔 다리 어깨 허리의 고통도 극심했지만, 시골 아줌마들의 대책없는 참견과 스킨십도 견디기 힘든 고충이었다. 잘생겼다면서 수시로 쓰다듬고 심지어 등짝까지 후려치는 아줌마들의 영상을 폰으로 받아본 지호는 급히 남해로 달려간다. 


안 올 줄 알았던 지호의 급작스런 방문에 세희는 커다란 반가움을 느낀다. 걱정돼서 달려왔다는 그녀의 말에는 한층 더 고마움을 느낀다. 장인의 친구 되시는 어른의 권유를 못 이기고 막걸리를 좀 과하게 마셨는데, 왜 거절하지 못하고 다 마셨느냐는 지호의 말에 서운함도 느낀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지호의 마음을 그제서야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11회에서 윤지호와 남세희 커플은 처음으로 진실된 마음을 주고받는다. 어쩌면 모순되지만 사실 그들의 사랑은 철저한 남남으로서 지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불공평한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감정을, 남남이기에 올곧이 갚으려는 노력을 통해 서로의 고충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관계에서도 당연하거나 쉬운 노동은 없다. 돈이라는 형태의 대가로서 규정되지 않는 한은 더욱 더 그렇다.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당연히 시집에 불려가서 가사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한국 여성들의 현실은 사실 매우 부당한 것이다. 함께 하는 거라면 당연하겠지만, 남자들은 김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수육이나 먹고 있는 현실이라면야!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남세희와 윤지호의 관계는 그래서 더욱 바람직하고 올바른 결과를 이끌어 낸다. 철저한 남남으로서 빚진 것 없이 공평하게 서로를 대하려는 마음이, 결과적으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는 사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김장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사 노동이 얼마나 허리 휘는 일인지, 그 노동을 기꺼이 해주는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큰 사랑인지를 세희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드라마로서 호평을 받고 있는데, 그와 더불어 어떤 사랑의 방식이 더욱 바람직한 것인지의 방향성도 제시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부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해 온 일들이, 실제적으로는 전혀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Comments
  • Favicon of https://happy-q.tistory.com BlogIcon 해피로즈 2017.12.31 16:39 신고 앞의 글, 너의 등짝에 스매싱은 안 봤는데, 이 드라마는 챙겨 봤었어요. 다른 방송의 드라마와 겹치는 시간이 있어서 어떤 때는 리모컨을 쥐고 요리 조리 돌리며 본 적도 있었지요.
    주제도 그렇고 대사도 다른 드라마하고는 좀 다른 게.. 제 맘을 끌더군요.

    빛무리님 새해에는 글 많이 쓰실거죠?^^
    좋은 재능 썩히시면 아깝습니다!!^^
  • Favicon of https://qlcanfl.tistory.com BlogIcon 빛무리~ 2017.12.31 22:56 신고 그러게요. 한 번 손을 놓다 보니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글 쓰기가 잘 안 되네요. 부담없이 슬슬 하다보면 오히려 잘 되려나 ㅎㅎ
    여하튼 새해에는 조금이나마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로즈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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