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스매싱' 박현경(엄현경)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본문
'너의 등짝에 스매싱' 홈페이지에는 "인생의 후반부에서 한 순간에 몰락해 버린 베이비부머 세대 가장의 눈물겨운 사돈살이, 또 애석하리만큼 큰 시련을 맞게 되는 영이 맑은 한 청춘이 꿈과 사랑에 대해 눈뜨는 웃픈 성장기를 담은 시트콤" 이라는 프로그램 소개가 나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현재 가장 불쌍한 처지로 사돈살이를 하고 있는 박영규와 박현경(엄현경) 부녀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모두가 깨알 재미를 주는 소중한 캐릭터들이지만.
그런데 아무리 현재 처지가 난감하다 해도 나는 박영규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작품들을 살펴볼 때, 김병욱(스텐레스김)은 중년 이후 캐릭터들에게 아무리 큰 시련을 주었더라도 결국은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준하, '지붕뚫고 하이킥'의 정보석, '하이킥3'의 안내상 모두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갔다. '감자별2013QR3'의 길선자(오영실) 역시 과정은 좀 달랐지만 결국은 남의 집 차고에 얹혀사는 처지에서 벗어나 그런대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청춘 캐릭터들은 좀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특히 청춘 연인들의 사랑이 무난히 이루어지도록 김병욱은 좀처럼 내버려두질 않는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민용(최민용)과 서민정은 결국 가슴아픈 이별을 선택했고, 더욱이 '지붕뚫고 하이킥'의 이지훈(최다니엘)과 신세경은 동반 죽음이라는 최대 비극을 맞이했다. '하이킥3'의 윤계상과 김지원도 기약없는 이별을 했고, 오직 이 커플만은 잘 될 거라 믿었던 윤지석(서지석)과 박하선마저도 묘하게 슬픈 느낌으로 열린 결말을 맞이했다.
'감자별'의 홍혜성(여진구)과 나진아(하연수) 커플도 마찬가지였다. 극중에서는 명확히 표현되지 않았지만 홍혜성이 떠나버린 진짜 이유는 불치병 때문이었음이, 종영 후 여진구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이렇듯 거의 매번 아련한 슬픔으로 마무리되는 청춘들의 사랑은 김병욱 시트콤의 상징 중 하나라고 보여진다. 첫사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기에, 수많은 청춘들은 오늘도 수많은 이별을 하고 그 아릿한 슬픔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설정이다.
반면 중년 캐릭터의 행복한 결말은 김병욱이 이 삭막한 사회에 던져주고 싶은 한 가닥 희망일 수도 있겠다. 사실 정준하와 정보석 캐릭터처럼 평생 일이 안 풀리던 사람이 갑자기 성공하게 된다든가, 안내상과 박영규 캐릭터처럼 제대로 망해서 쪽박찼던 사람이 재기하여 에전의 영광을 되찾게 되는 것은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일이다. 중년 이후에는 남은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김병욱은 중년 이후의 가여운 패배자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허락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실패해도 다음 번의 기회가 있고, 또 다음 번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는 청춘들과 달리, 이미 황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큰 실패란 너무도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목표와 실낱같은 희망마저 포기해버린 누군가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리며" (홈페이지) 스텐레스김은 비록 가상의 인물이나마 그들의 성공을 통해 현실 속 인물들이 "잠시나마 웃고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기를" (홈페이지) 소망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이가 너무 힘든 시대라, 왜 젊다는 이유로 실패하거나 고통받아도 되느냐고 항의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청춘의 통과의례라고 하기에도 현실이 너무 팍팍해져 버려서...)
여하튼 이런 패턴으로 볼 때, 박영규 캐릭터는 충분히 재기하여 새로운 사업에 성공하고 출가해버린 아내도 되찾을 수 있을거라 짐작된다. 그리고 현재 찌질남의 정석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며 아내 장도연에게 얹혀 살고 있는 권오중 캐릭터 역시 결국은 성공하게 될 것 같다. 아웅다웅 하면서도 운명의 짝임을 보여주는 이들 부부는 언뜻 '지붕킥'의 정보석 이현경(오현경) 부부를 연상케 한다. 특히 늘씬한 체격에 운동 능력 출중하고 탄탄한 직업까지 갖춘 아내 장도연의 모습에는, 긴 다리로 하이킥을 날리던 오현경의 모습이 쉽게 오버랩된다.
그런데 박현경 캐릭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초반부터 벌써 그녀에게는 갖가지 큰 시련이 닥쳐 있다. 아빠의 사업이 쫄딱 망해서 갈 곳 없이 사돈댁에 얹혀사는 신세고, 골프공을 주워 팔다가 절도죄로 한 달 복역하고 나왔으니 그 창창한 나이에 어처구니 없는 전과자가 되었고, 게다가 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노안에다가 각막 궤양까지 앓고 있어서 그녀가 꿈꾸는 네일아트 일도 어쩌면 할 수 없게 될 상황이다.
현재 그녀와 젊은 의사 이현진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형성되며 썸이 시작되는 듯한데, 아무래도 이현진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더욱 걱정스럽다. 어린 나이에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는 슬픈 과거까지 설정해 준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캐릭터 같기는 한데 ('하이킥3'의 김지원이 떠오름...) 어딘지 편안한 느낌은 아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함께 시청하는 남편은 이현진을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 때때로 나보다 훨씬 날카로운 직관력과 통찰력을 자랑하는 사람이라 나는 그 의견을 흘려들을 수가 없다..;;
병원에서 마취제 도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상한 모습을 보인 사람은 중년 의사 윤서현이었지만, 오히려 너무 대놓고 그랬기 때문에 아닌 것 같다고 남편은 말했다. 역시 젊은 의사가 가장 의심스럽다고... 만약 그 추측대로 이현진이 범인이라면 박현경은 인생의 역경 속에서 모처럼 한 줄기 빛처럼 사랑하게 된 남자가 연쇄살인범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맞이해야 한다. 설상가상 "애석하리만큼 큰 시련을 맞게 되는 영이 맑은 한 청춘"이라는 홈피의 표현으로 볼 때, 박현경에게 닥쳐올 시련은 앞으로도 더 남았음이 분명하다.
애석하리만큼 큰 시련이 무엇일까? 설마 눈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시력을 잃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섣불리 전과자임을 밝혔다가 의심받고 누명 쓰고 살인 범죄에 연루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때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사랑으로 인한 시련이다. 16회까지 방송된 현재 박현경은 가면 쓴 기타리스트 (일명 가면남)의 연주에 홀딱 반해서 없는 돈에 클럽을 방앗간처럼 드나드는 중이고, 미스테리한 의사 이현진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서서히 다가서는 중인데, 과연 가면남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현진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둘 중 누가 그녀의 연인이 될 것이며, 그녀에게 커다란 기쁨과 아픔을 주게 될까?
사실 박현경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캐릭터는 아니다. 영이 맑은 것도 좋고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뻔뻔한 민폐형이기 때문이다. (특히 언니 슬혜와 사돈 박해미에게...) 하지만 요즘의 나는 예전과 달리 그러한 인물도 조금은 이해해 보려고, 예쁘게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물론 천성이야 바뀔 수 없겠지만 너무 칼 같은 성격을 자제하고, 나도 조금쯤은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서라도 그렇게 남들에게 기대고 비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끼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전에는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차갑게 보았지만, 이제는 좀 따뜻하게 보려고 노력한다. (물론 민폐 행각이 너무 지나치면 노력도 쉽지는 않겠지만..ㅎㅎ)
그래서 청춘 캐릭터가 결말 부분에서 꼭 슬퍼지는 김병욱 시트콤의 패턴을 깨뜨리더라도, 이번에는 박현경이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씩씩한 척해도 이미 그녀는 너무 많이 상처입었고, 너무 많이 고통받았다. 앞으로 닥쳐올 시련과 고통이 더 있겠지만 그녀는 무한 긍정의 해맑은 성품으로 다 이겨낼 것이고, 어쩌면 사랑조차 이루게 될지 모른다. 오히려 희망으로 가득해 보였던 커플들이 이별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어둡고 불안해 보이는 현경의 사랑은 행복해지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를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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