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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자부심 없는 밥그릇은 먹으면서도 비참한 겁니다!" 라고 옥다정(이요원)은 외친다. 언제 어디서나 그녀의 행동과 마음가짐은 한결같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것을 절대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 분명 자신이 '을'인 상황에서도 결코 '갑'에게 숙이지 않는다. 을이 갑에게 대들다가는 곧바로 와장창 깨지는 것이 현실인데, 신기하게도 옥다정은 깨지긴 커녕 오히려 갑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니 같은 을의 입장에서 보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시원스런 사이다녀에게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아니 오히려 현실을 알기 때문에 옥다정의 성공적인 반란이 더욱 통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옥다정이 '욱다정', 혹은 '욱씨'라고 불리는 이유는 걸핏하..
평소 눈길을 주지 않던 일일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은 이유리의 이름 때문이었다. MBC 연기대상의 영예까지 안겨 주었던 '왔다 장보리'의 대성공 후 1년 4개월만의 공중파 복귀였다. 그 동안 케이블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선보이긴 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던 터라, 공중파 복귀를 앞두고 작품 선정에 무척이나 고심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일일극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약간 의아했으나, 어쩌면 이유리에게는 가장 안정적인 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민정'이라는 희대의 악녀 연기로 주목받았던 이유리에게는 갈등의 수치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있다. 드라마의 본질은 '갈등'이다. 갈등이 없는 드라마는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자극적인 막장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
일제히 시작된 지상파 3사의 월화드라마 대전에서 MBC의 '몬스터'를 택한 이유는 작가 때문이었다. 장영철, 정경순 작가의 전작 중 '자이언트'를 재미있게 시청했던 기억이, 또 다른 장편 복수극 '몬스터'를 향한 기대감도 약간 고취시켰던 것이다. 출연하는 배우들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SBS '대박' 쪽으로 기울었지만, 작가가 '무사 백동수'의 권순규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장근석, 여진구를 향한 마음은 안타까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KBS의 '동네변호사 조들호'는 내가 이향희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다가 소재가 너무 식상해서 끌리지 않았다. 최근 2~3년 동안 '약자의 편에 서서 갑들과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또는 검사나 경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및 드라마를 도대체 몇 편이나 보았던 ..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
'협상극'이라는 매우 생소한 장르를 표명하고 시작된 드라마 '피리부는 사나이' 1회는 제법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했지만, 전개 과정에는 허술함이 많았다. 특히 여명하(조윤희)의 캐릭터는 적잖이 답답해 보여, 민폐 여주인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짙어 보였다. 하지만 '협상전문가'라는 남주인공 주성찬(신하균)의 직업과 캐릭터는 매우 신선하고 뚜렷해서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소통 부재의 시대가 낳은 괴물 '피리부는 사나이'의 정체는 궁금증을 자극함과 동시에 진한 비극의 페이소스를 예감케 한다. 잔인한 세상과 소통할 방법이 없는 약자들에게 '피리부는 사나이'는 '폭력'이라는 통로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릇된 방식의 소통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오직 파멸뿐이기에, '피리부는 사나이'와 손잡은 약자들은 가장 먼저 희..
무심히 1, 2회를 보았다가 의외로 빠져들어 꾸준히 시청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 더 해피엔딩'이 한국드라마의 고질병인 뒷심 부족을 극복할 수는 없을 듯하다. 생각지도 못한 로코의 재미에 흠뻑 젖게 만들었던 초반에도 사실 우려되는 부분은 있었다. 분명 남주인공은 송수혁(정경호)인데, 조연인 구해준(권율)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매력적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어차피 여주인공 한미모(장나라)와 연결되지 못할 것을 아는데 너무도 심쿵하게 멋져 보이니, 이후의 전개가 설득력을 확보하기는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우려는 적중했다. 물론 송수혁도 충분히 멋있지만 초반의 구해준 만큼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지는 못한 탓에, 한미모와 송수혁의 달달한 연애가 시작되었어도 나는 그에 빠져들기보다 구해준을 향한 안타까움이 ..
처음으로 선보이는 100% 사전 제작 드라마라 하여 큰 기대를 가졌는데 '태양의 후예' 1, 2회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과장된 내용에 개연성은 떨어지고, 대략 성격 급한 금사빠 남녀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였다. 특히 장군도 아닌 한 명의 대위를 픽업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병원 옥상으로 날아오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터질 지경이었다. 내용에 공감과 몰입이 되지 않으니, 송중기와 송혜교의 미친 비주얼에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놓지 않은 이유는 주된 공간적 배경이 중동 지역인지라, 그 곳의 참담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주인공들의 모습은 서울에서의 그것과 매우 달라질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3회에서 이미 예상은 적중했다. 서울에서의 짧은 만남과 이별 후 중동 우르크에서 우연처럼 재회한 유시진(송..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은 풋풋한 대학 생활을 그리고 있지만, 그 어떤 막장극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소름끼치는 악역들로 가득하다. 특히 김상철(문지윤), 오영곤(지윤호), 남주연(차주영)은 꿈에서라도 만날까 두려운 인물들이다. 손민수(윤지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매우 짜증나는 인물이다. 고정 캐릭터뿐 아니라 홍설(김고은)의 자취방에서 도둑질을 하던 가짜 집주인 손자처럼, 단발성 캐릭터 중에도 끔찍한 악역들은 속속들이 꽂혀 있다. 내가 보기에 '치인트' 속 세상은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삭막하여 꼭 지뢰밭 같다. '치인트'의 악역들이 막장드라마의 악역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막장드라마의 악역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기업..
김수현 작가의 신작 '그래 그런거야'가 막장의 홍수 속에 따뜻한 가족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법 야심차게 시작되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썩 좋지 못한 편이다. 첫방송은 4%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고, 해당 기사에는 재미가 아닌 피로를 느꼈다는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반드시 김수현 특유의 따발총 대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개인주의적 사고와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들에게, 대가족이라는 집단의 모습은 더 이상 따뜻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라 이름붙여진 그 거대한 집단의 일률적 원칙을 내세워 구성원 개개인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노인들의 모습은 한없는 갑갑함으로 느껴질 뿐이다. 1년 365일 내내 명절 분위기를 이어가는 대가족 안에서 안주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주부 한혜경..
‘육룡이 나르샤’ 36회에서 드디어 선죽교가 정몽주(김의성)의 피로 물들었다. 어떻게 될 줄을 모두가 알면서도 손꼽아 기다려 온 ‘피의 선죽교’ 그 명장면이 드디어 방송된 것이다. 이방원(유아인)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구태의연한 시조 형식이 아닌, 새로운 해석을 곁들여 대사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김의성과 유아인의 명연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명장면을 감상하면서도 나의 가슴이 울리지는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표현되는 ‘하여가’에 김영현 작가는 ‘백성’의 존재를 대입시켰다. 이방원의 원래 시조가 “우리끼리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면 되지, 나라가 바뀌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