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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최근 나영석 PD의 예능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던 소지섭과 '으라차차 와이키키'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여배우 정인선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가 9월 27일 첫방송 되었다. 원래 수목드라마로 편성되었지만 추석 연휴 기간이라 수요일에는 특집 방송이 전파를 탔던 관계로, 목요일에 잇달아 4회를 방송하며 야심찬 출발을 알렸던 것이다. 과연 소지섭과 정인선은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륜이 채워질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는 소지섭의 눈빛과, 아역 출신으로 만만찮은 경력을 지닌 정인선의 풍부한 표정 연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과 슬픔과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방송에서부터 너무 뚜렷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갈등'이다. 갈등 없이는 어떤 드라마도 만들어질 수 없기에, 드라마는 '갈등'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갈등은 바로 '악역'에게서 비롯된다. 현실 속 세상이 그렇듯이 드라마 속 세상에도 나쁜 인간들이 존재하고, 그 나쁜 인간들의 활약이 도드라질수록 드라마의 갈등은 심화되며, 갈등이 심화될수록 드라마의 흥미는 더해진다. 때로는 막장이라고 욕을 먹기도 하지만, 솔직히 악역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최후에 그 악역이 몰락하면서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줄 때의 쾌감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매력적인 악역은 그 존재감으로 선한 주인공을 제압하며 해당 드라마의 최고 인기 캐릭터로 자리잡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고현정이 열연했던 '선덕여왕'의 '미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역시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게 '미스터 션샤인'에는 재치있고 맛갈스런 명대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 중에도 최고의 명대사를 꼽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9회에서 고애신(김태리)의 입을 통해 표현된 "나는 불꽃이오"라는 대사를 선택하고 싶다.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사대부 여인들은 다들 그리 살던데"라는 유진초이(이병헌)의 말에 고애신은 담담히 미소지으며 그렇게 답했던 것이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죽음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의병으로서의 삶을 그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글프게도 대부분 존재의 흥망성쇠는 힘의 논리로 좌우된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과는 별 상관이 없다. 국가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옳고 선한 것이라 할지라..
'너의 등짝에 스매싱' 홈페이지에는 "인생의 후반부에서 한 순간에 몰락해 버린 베이비부머 세대 가장의 눈물겨운 사돈살이, 또 애석하리만큼 큰 시련을 맞게 되는 영이 맑은 한 청춘이 꿈과 사랑에 대해 눈뜨는 웃픈 성장기를 담은 시트콤" 이라는 프로그램 소개가 나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현재 가장 불쌍한 처지로 사돈살이를 하고 있는 박영규와 박현경(엄현경) 부녀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모두가 깨알 재미를 주는 소중한 캐릭터들이지만. 그런데 아무리 현재 처지가 난감하다 해도 나는 박영규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작품들을 살펴볼 때, 김병욱(스텐레스김)은 중년 이후 캐릭터들에게 아무리 큰 시련을 주었더라도 결국은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감자별2013QR3' 이후 갑작스런 김병욱 감독의 은퇴 선언은 가히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작품이 방송되는 동안에는 온 마음을 기울여 열렬히 시청하고, 한 작품이 끝나면 또 그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오려나 학수고대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온 나에게, 이제 더 이상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공존하는 그의 시트콤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은 단순히 아쉽다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상실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상업주의 만연한 이 시대에,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과 신념을 고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겹고도 외로운 일일 터였다. 어쩌면 이제 지칠 때도 되었다 싶었고, 만약에라도 험한 방송가에서 더 버티다가 그만의 고유한 색깔이 변질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쯤에서 영..
윤지호(정소민)와 남세희(이민기)의 관계는 철저한 남남으로서의 계약 관계였다. 세입자와 집주인으로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철저히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서 성립된 상호협의하의 비밀 결혼이었다. (적어도 그들의 짧은 생각에는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완전한 남남으로서, 객체로서의 상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의 이유가 되었다. 임신한 여자친구들 데리고 들이닥친 남동생 때문에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윤지호에게는 편히 한 몸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하우스푸어인 남세희에게는 다달이 월세를 납부하면서 고양이와 집 관리도 해줄 수 있는 깔끔하고 성실한 세입자가 필요했다. 이렇게 윤지호와 남세희는 서로가 생활의 필요충분조건을 채워주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필요충..
바야흐로 13년 전인 2004년, 아직 신인 드라마 작가였던 김은숙은 '파리의 연인'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여주인공의 꿈(소설)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된 결말은 대다수 시청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나도 그 작품을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솔직히 결말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결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흥분할 게 있나 싶었다. 하지만 나 같은 시청자보다는 그 결말에 충격받고 분노한 시청자가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최근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를 연달아 빅 히트시키며 새삼스레 저력을 과시한 김은숙 작가는 백상예술대상에서 두 번의 극본상과 TV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선지 모처..
드라마 '군주-가면의 주인'을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편의 유명한 문학 작품이 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다. 얼굴이 무척 닮은 에드워드 왕자와 거지 소년 톰의 운명이 필연처럼 뒤바뀌면서, 생생한 체험을 통해 밑바닥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왕자는 훗날 폭군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진정한 성군이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몇 가지 설정과 상황은 다르지만 '군주'의 주인공인 세자 이선(유승호)도 서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한 후 결국은 에드워드처럼 위대한 성군이 될 것이다. 세자 이선 역의 유승호와 한가은 역의 김소현은 아역 시절부터 수많은 작품을 통해 연기 내공을 다져 왔으며, 더욱이 사극 경험이 많은 터라 현재 8회까지 방송된 '군주'에서도 전혀 어색함 없이 탄탄한 연기..
'역적'의 후속작으로 방송 예정인 드라마 '파수꾼'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배우 신동욱 때문이었다. '복면가왕'을 시청하던 중 뜻밖에도 가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신동욱의 존재가 퍽이나 반갑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창 좋았던 시절에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라는 희귀병에 걸려 혹독한 아픔과 싸우며 무려 7년 동안이나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던 그의 얄궂은 운명은 참으로 가슴저린 것이었는데, 그래도 많이 나아져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신동욱은 '복면가왕' 인터뷰에서 자신의 복귀작인 드라마 '파수꾼'을 간단히 언급하며,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했다. 그 때 짧게 자료 화면이 나왔는데, 검은 사제복을 입고 천천히 화면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신동..
'추적자', '황금의 제국', '펀치'로 이어지는 박경수 작가의 묵직하면서도 신선한 작품 세계에 적잖이 매혹당했던지라 그의 신작인 '귓속말'을 꽤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게다가 믿고 보는 여배우 이보영의 원톱 주연이라기에 더욱 기대가 컸는데, 한편으로는 박경수 작가가 과연 얼마나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그려낼 수 있을지 우려되는 마음도 있었다. 워낙 선이 굵고 남성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작가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성의 섬세한 내면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좀 부족하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전작들은 모두 남주인공 원톱이었고, 여주인공들은 상대적으로 무척 비중이 적었을 뿐 아니라 충분히 매력적이지도 못했었다. 막상 뚜껑이 열리니, 나의 우려가 좀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보영의 연기력은 예상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