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태양의 후예' 송중기 송혜교, 가슴 저릿한 휴먼 멜로가 시작된다 본문
처음으로 선보이는 100% 사전 제작 드라마라 하여 큰 기대를 가졌는데 '태양의 후예' 1, 2회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과장된 내용에 개연성은 떨어지고, 대략 성격 급한 금사빠 남녀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였다. 특히 장군도 아닌 한 명의 대위를 픽업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병원 옥상으로 날아오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터질 지경이었다. 내용에 공감과 몰입이 되지 않으니, 송중기와 송혜교의 미친 비주얼에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놓지 않은 이유는 주된 공간적 배경이 중동 지역인지라, 그 곳의 참담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주인공들의 모습은 서울에서의 그것과 매우 달라질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3회에서 이미 예상은 적중했다. 서울에서의 짧은 만남과 이별 후 중동 우르크에서 우연처럼 재회한 유시진(송중기)과 강모연(송혜교)은 다시 서로에게 끌리며 달달한 연애의 시작을 알렸지만, 곧이어 거세게 불어닥친 운명의 회오리는 두 사람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다. 자칫 한 순간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목숨마저 잃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위기였다. 서울에서의 유시진은 허세가 다분하고 지나치게 쿨해 보였으며, 서울에서의 강모연은 적당히 속물적인 깍쟁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척박하고 머나먼 그 땅에서 위기와 마주했을 때, 강모연은 침착했고 유시진은 용감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강하고, 멋있었다.
강모연의 캐릭터가 제법 흥미롭다. 예쁘고 능력있는 이 의사 아가씨는 약간의 위악적 성향을 지녔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깍쟁이같은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내면에는 측은지심과 희생정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돕는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늘 손해만 본다는 것을, 심지어 제 밥그릇도 챙겨먹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똑똑한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빽 하나 없는 흙수저라 최고의 실력을 지녔음에도 번번이 승진에서 밀려나는 현실임에랴.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더 깍쟁이인 척한다. "난 슈바이처 될 생각 없어요. 출세할 거예요!"
유시진의 캐릭터는 한 여자를 사랑함으로써 더욱 큰 인류애를 깨닫고, 이전까지와는 다른 가치관을 정립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발전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지난 2회에서 유시진은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군인입니다. 군인은 명령으로 움직입니다. 때로는 내가 선이라 믿는 신념이 누군가에겐 다른 의미라 해도, 저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말을 듣고 강모연은 자신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즉시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3회에서 유시진은 대놓고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며 자기 뜻대로 행동한다. 얼마 전까지 "군인은 명령으로 움직입니다!" 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던 그가 말이다.
이는 유시진의 인생관 및 가치관이 어느 시점부턴가 변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예전에 그는 뼛속까지 철두철미한 군인이었다. 군인에게는 스스로의 판단보다 상관의 명령이 우선이었기에, 그에게는 명령에 따르는 것만이 절대선이었다. 굳이 남들의 이해를 구하지도 않을 만큼 그는 신념에 당당했다. 그런데 왜 한 순간 신념을 무너뜨렸을까? 분노에 가득찬 상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무전기를 꺼 버리고,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가볍게 무시해 주고, 화려한 동작으로 총을 뽑아들며 무장한 아랍인들을 겨누었을까? 더 이상 그에게 상관의 명령은 절대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바꿔 놓은 새로운 가치관은 무엇일까?
항명의 맨 처음 시작은 강모연이라는 한 여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랍인들이 하자는 대로 해 줘. 그래서 환자가 죽으면, 그건 수술 안 한 의사 개인의 과실로 책임을 돌리면 돼. 우리 군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명령이야!" 상관의 명령에 따르면, 이 엄청난 사태의 후폭풍을 애먼 그녀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아부다드 왕가의 일족이며 강력한 노벨상 후보인 아랍연맹의장 무바라트가 심장 발작으로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강모연은 긴급 수술로 그를 살리려 했지만 경호원들의 저지에 막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랍 지도자의 몸에 외국인이 칼을 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주치의가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은 커녕 20분만 지나도 환자는 죽게 된다고 강모연이 외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경호원들은 총구를 그녀에게로 향하며 무바라트의 몸에서 손을 떼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군대는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한 채 발을 빼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운 나쁘게 한국 군대의 주둔지에서 무바라트가 사망한다 해도, 의사 한 명의 개인적 과실로 돌린다면 아랍과의 정치적 군사적 분쟁은 막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죄 없는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더라도 전쟁을 막고 더 큰 희생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예전의 유시진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과 달라졌다. 누가 뭐래도 그는 그녀가 억울한 희생양이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쿨하게 무전기를 꺼 버리고 총을 뽑아들 때, 유시진의 마음속을 가득 채운 절대선은 상관의 명령이 아니라 강모연을 향한 사랑이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한국 군대의 결정은 얼마나 야비한 것이었나? 대의를 위해서라고 아무리 변명한대도, 죄 없는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그 '억울한 한 사람'이 될 수 있기에, '군인' 아닌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직 '군인'으로 살아가던 유시진은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본연의 '인간'으로 회귀한다.
명령에 불복하고 아랍인들과 충돌했으니 유시진은 호된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강모연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무바라트의 생사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겠지만, 이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해도 이후에는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군인'의 가치관과 '인간'의 가치관은 계속해서 충돌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사랑하는 만큼이나 갈등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강모연은 위악의 보호막을, 유시진은 군인의 사명감을 벗어 던지고, 척박한 환경과 모진 굶주림과 잦은 전쟁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꼭 안아주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마더 테레사는 말씀하셨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는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 라고 대답하셨다. 결국 인생에 소중한 것은 거대한 사명감이 아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심지어 총칼의 위협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은 한 번의 따뜻한 포옹, 한 번의 다정한 미소, 곁에 있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강모연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유시진의 사랑이 더 넓고 크게 성장하면서, 손발 오글거리던 그들의 멜로는 가슴 저릿한 휴먼 멜로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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