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그래 그런거야' 서지혜, 아무도 공감 못할 이상한 캐릭터 본문
김수현 작가의 신작 '그래 그런거야'가 막장의 홍수 속에 따뜻한 가족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법 야심차게 시작되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썩 좋지 못한 편이다. 첫방송은 4%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고, 해당 기사에는 재미가 아닌 피로를 느꼈다는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반드시 김수현 특유의 따발총 대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개인주의적 사고와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들에게, 대가족이라는 집단의 모습은 더 이상 따뜻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라 이름붙여진 그 거대한 집단의 일률적 원칙을 내세워 구성원 개개인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노인들의 모습은 한없는 갑갑함으로 느껴질 뿐이다.
1년 365일 내내 명절 분위기를 이어가는 대가족 안에서 안주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주부 한혜경(김해숙)은 아직 한겨울 날씨임에도 수시로 훅훅 끼쳐오는 더위를 느끼며 부채질을 해댄다. 평생 시부모를 봉양하고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며 수많은 시댁 식구들의 뒤치다꺼리를 해 온 그녀의 나이도 어느 덧 환갑에 이르렀건만,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부단히 이어지는 갑갑한 일상은 당최 끝이 보이질 않는다. 89세의 시부 유중철(이순재)와 83세의 시모 김숙자(강부자)는 아직도 건강한 신체 만큼이나 녹슬지 않은 고집과 까다로움으로 무장한 채 한혜경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키고 있다.
게다가 김숙자의 여동생 김숙경(양희경)은 63세 나이에 혼자 살면서 언니네 집을 매일 자기 집처럼 드나든다. 입이 싸고 정에 굶주려서인지 온갖 일에 참견을 하다가 툭하면 이런저런 말실수와 사고를 쳐댄다. 그런 시이모의 존재 하나만도 벅찬 판에, 남편의 배다른 형들과 손윗동서들과 조카들에게도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한다. 옛날에는 중년 여인들의 그러한 삶이 당연시 되었는지 모르나, 현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한혜경의 삶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게다가 집안에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손주사위까지 온 가족 전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야만 한다는 융통성 없는 원칙에는 울컥 화가 치밀 지경이다.
유중철의 맏손녀 세희(윤소이)는 결혼 1년차인데, 그녀의 남편은 광고회사 감독이다. 직업의 특성상 밤샘 편집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이 처 증조할아버지(유중철의 부친)의 제삿날이었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당장 내일까지 편집을 마쳐서 광고를 내보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솔직히 자기 아버지의 제삿날이라도 집에 못 들어갈 수 있다. 하물며 장인도 아니고, 처 할아버지도 아니고, 처 증조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을 팽개치고 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유중철은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더욱이 세희의 숙부인 유경호(송승환)는 조카사위가 처 증조부의 제사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이건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 부당하고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전혀 부당하다 여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김수현 작가는 험난한 세상 속에서 가장 든든하고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겠다고 했지만, 이쯤되면 따뜻한 울타리가 아니라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최 이러한 설정에 공감과 따뜻함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몇이나 되겟는가?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 투성이지만, 그 중에도 가장 황당한 캐릭터는 유중철의 손주며느리 이지선(서지혜)이다. 유중철의 장남 유민호(노주현)에게는 승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승균은 지선과 결혼한지 고작 두 달만에 사고로 죽었다. 설상가상 아들의 허망한 죽음에 충격받은 유민호의 아내마저 일주일만에 아들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유민호는 삽시간에 처량한 홀아비가 되었고, 서른 살의 며느리 이지선은 청상과부가 되었다.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그 때 눈물을 뿌리며 이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 이상 유민호와 이지선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 고리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지선은 희한한 선택을 했다. '혼자 남겨진 시아버지를 두고 제 볼일 보겠다고 자신마저 떠나는 건 사랑했던 남편에 대한 신의를 망치는 것이고 그 사랑을 가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기로 한 것이다.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변치않는 사랑은 물론 애틋하고 감동적이지만, 그 사랑에서 비롯된 현실적 결과가 홀시아버지와의 기묘한 동거라니 당최 그녀의 선택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지선이 승균의 유복자라도 낳았다면 모를까, 아이도 없는 상황에서 60대의 건강한 시아버지와 30대의 며느리가 단둘이 산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반대했지만 이지선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렇게 홀시아버지와 단둘이 살아 온 세월이 벌써 5년이나 흘렀다. 그들 나름대로는 이제 부녀처럼 지낸다고 하지만, 지선의 친정 엄마 이태희(임예진)는 날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급기야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가 좀 이상한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어떻게든 딸의 기묘한 동거를 끝내게 하고 싶은 태희는 그 말을 숙경에게 흘리고, 입 싼 숙경은 제삿날이랍시고 온 가족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그 흉한 소문의 내용을 쏟아내고 말았다. 면전에서 그토록 모욕적인 말을 전해 들은 유민호는 깊이 상처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방송되지 않은 3회 예고편을 보니, 나중에서야 그 말이 친정 엄마 태희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선이 펄펄 뛰고 있었다. "엄마가 뭔데 우리 아버님을 모욕해? 그럴 자격 있어? 난 누가 뭐래도 죽을 때까지 아버님 모시고 살 거야!" 뭐 이런 대사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무의미한 고집일 뿐이다. 함께 살면서 밥도 차려 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주변으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 외로운 편이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민호는 건강과 재력과 외모까지 겸비한 노신사인데 재혼의 기회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두 사람의 동거는 이지선 뿐만 아니라 유민호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지선은 친정 엄마의 가슴에 대못까지 박으며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지금이 조선시대라서 열녀문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 황당한 캐릭터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과거 김수현 작가는 캐릭터 창조의 귀재였다. 하나 하나 뚜렷한 개성으로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히 말하고 움직이는 김수현의 캐릭터들은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옛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도 공감 못할 이상한 캐릭터와 피로감만 가득한 가족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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