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애인있어요’ 도해강의 변화, 작품의 주제가 드러나다 본문
김순옥 작가의 전작 ‘왔다 장보리’를 재미있게 보았으므로 나의 처음 선택은 ‘애인있어요’가 아닌 ‘내 딸 금사월’이었다. 막장이라도 박진감 있는 전개와 찰진 재미가 보장된다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 저녁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내 딸 금사월’은 도통 매력없는 캐릭터들과 최소한의 설득력조차 확보하지 못한 전개로 나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여주인공 금사월(백진희) 캐릭터는 몹시 답답하고, 남주인공 강찬빈(윤현민) 캐릭터는 심히 밋밋하다. 게다가 금사월과 강찬빈은 왜 사랑에 빠지는지, 신득예(전인화)의 복수는 왜 그토록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악역인 강만후(손창민)와 오혜상(박세영)은 왜 그토록 허술하고 우스꽝스러운지, 당최 보면서 전혀 몰입할 수가 없었다.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가 다분히 막장스럽긴 해도 이토록 밍숭밍숭하고 엉성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작품에 임하는 열의와 성의가 매우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참다못해 시청을 포기할 무렵, 동시간대의 경쟁 드라마 ‘애인있어요’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도 당당한 남편, 속이 뒤집히도록 뻔뻔한 불륜녀, 그럼에도 조강지처는 헤어질 수 없다고 여전히 남편을 사랑한다고 매달리지만 결국 쫓겨나고 마는, 그 와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고 어쩌고... 초반의 전개는 간략한 줄거리만 들어도 결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짜증나는 클리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청자의 반응은 꽤 좋은 편이라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중반 이후 기억을 잃은 여주인공 도해강(김현주)과 그 남편 최진언(지진희)이 재회하면서부터 더욱 호평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는 솔깃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궁금증에 몇 번 시청했는데 최소한 ‘금사월’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뒤늦게나마 미련없이 갈아타고 말았다.
대중의 호평에 비해 나의 개인적인 몰입도는 크지 않은 편이었다. 다만 김현주와 지진희의 명품 연기에는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지진희가 그토록 애절한 멜로의 느낌을 잘 살려내는 배우인 줄을 나는 처음 알았다. (이미 수십 년의 경력을 지닌 중년 배우인데,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그리고 1인 3역을 오가며 매순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신해가는 김현주의 연기력에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없이 순하고 해맑은 선녀 같다가도, 다음 장면에서는 몰라보게 독하고 차가운 마녀가 되어 있다. 마녀의 모습에서 더욱 전율이 느껴지는 이유는 김현주의 실제 성품이 선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량한 배우도 악역을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지만, 1인 2역 이상을 동시에 소화하며 순간적인 몰입도를 매번 극대화시킨다는 것은 매우 탁월한 능력임에 분명하다.
‘애인있어요’는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작품이다. 주인공들뿐 아니라 주변인들과 악역의 심리까지 매우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진하게 우려낸 국물처럼 감칠맛이 느껴지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최진언의 초반 캐릭터가 너무 진상으로 표현되었던 점이다. 비록 나는 앞부분을 시청하지 않았지만, 자기 아버지 최만호(독고영재)에게 “제발 저 여자(도해강)를 제 인생에서 치워 주세요!”라고 애원했다는 내용은 단지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지경이었다. 불륜녀와 살고 싶다며 조강지처를 대신 좀 내쫓아 달라고 아버지한테 부탁하는 남자라니... 그렇게 못되고 찌질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수년 후 기억 잃은 아내와 재회하여 다시금 불타오르는 사랑을 시작한다는 설정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다행히도 지진희의 애절한 멜로 연기가 호평을 받으며 “연기에 설득당한다”는 평가를 이끌어냈지만, 스토리상으로는 무리한 전개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배유미 작가는 좀 더 현실적인 인물을 창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실제 사람의 감정은 몹시 변덕스럽고 치사스러울 때가 많다. 곁에 있을 때는 지겹다고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퍼부으며 밀어내지만, 정작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곁에 있던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고는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다. 어쩌면 최진언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별로 잘나지 못한, 그런 보통의 남자로 설정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완벽한 남자의 캐릭터는 도해강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비련의 외사랑남 백석(이규한) 쪽이다. 지성과 인품과 외모까지 겸비한 이 젊은이는 오직 해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 하니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슬픔마저 내색 않고 홀로 삼킨다. 그런 백석을 가리켜 해강은 ‘등대 같은 남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등대’가 아니라 ‘등신’같은 남자 최진언이었다.
요즘은 사랑 못지않게 조건으로 결합하는 남녀가 많긴 하다.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시작조차 안 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기 뜻대로 선택과 조절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야 어디 뜻대로 되던가? 마음 같아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등대’를 선택하고 싶지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은 ‘등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사랑이다. 어쩌면 작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과 사랑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백석이라는 청정무구한 완벽남은 저만치 멀리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별처럼 등대처럼 빛나게 놔두고,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는 죄악과 결점 투성이인 못난이들이 서로 부대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드라마는 드라마다. 너무 지나치게 현실적인 드라마는 오히려 공감과 호응을 얻기 힘들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팍팍하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적당한 휴식과 달콤함이 필요한 것이다. 신데렐라 스토리가 그 식상함과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이유 역시 현실도피의 달콤한 유혹을 다수의 시청자가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주인공 최진언의 캐릭터를 초반에 조금만 덜 망가지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후반의 몰입도와 공감을 훨씬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찌질한 사랑을 했더라도 드라마에서는 멋진 사랑을 간접 체험하고 싶은 것이 시청자의 마음이니까 말이다. 눈빛만으로 심쿵을 유발하는 지진희의 명품 멜로연기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자꾸만 백석에게로 향한다. 해강을 향한 그 해바라기 사랑이 안타깝고, 그를 외면한 해강의 선택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애인있어요’에는 멜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대 자본을 무기로 선량한 약자들을 수없이 짓밟는 대기업 ‘천년제약’의 횡포가 있고, 그 중심에는 악의 축인 최만호 회장과 그의 사위이자 하수인인 민태석(공형진)의 존재가 있다. 더욱이 수십 년 전 최만호는 등반사고를 위장하여 도해강의 아버지인 독고지훈을 살해하고 그가 개발한 신약을 가로챈 죄과가 있다. 결국 도해강과 최진언은 흔하디흔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고 말았으니, 과연 그들의 결합이 가능할까? 그런데 40회 방송을 시청한 후, 나는 이 작품이 어느 덧 멜로의 경계를 넘어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인있어요’는 이제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욱 크고 소중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드라마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의 정체성이 단지 멜로에 국한된다면, 여주인공이 어찌 가증스런 연적을 위해 진심어린 사과와 충고와 애원을 할 수 있겠는가? 강설리(박한별)는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앙큼한 불륜녀에 불과하다. 최진언이 유부남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혹했고, 감히 그 추악한 욕망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 어쩌고 저쩌고 해봐야 모두 변명일 뿐이다. 시청자는 강설리를 용서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오히려 도해강이 강설리를 먼저 용서했다. 천년제약의 사냥개처럼 살던 과거에 도해강 역시 많은 사람에게 죄를 지었지만 강설리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강설리와의 관계에서는 피해자일 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강은 먼저 설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까지 했다. 그 이유는 사랑, 남녀간의 사랑을 넘어서 훨씬 크고 깊어진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직 젊은 강설리가 증오심과 집착 따위의 하찮은 감정에 얽매여 자기 인생을 낭비하며 스스로 파멸해가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도해강의 그 마음은 숭고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측은지심이다.
강설리에게 푸독신의 부작용을 말해주지 않은 것은 사실 잘못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부분이었지만, 도해강은 그에 대한 사과부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너만큼이나 그 때의 내가 나도 저주스러워. 어른답지도 사람답지도 못했어. 그저 상처받고서 더 상처받지 않으려고 날카로운 발톱만 상대를 향해 휘두르는 괴물이었어. 너한테 무릎 꿇을 게 아니라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사랑한다고 해야 했어. 너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한 짓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웠던 거야.”
해강의 변해버린 태도에 설리는 당황한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해강은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일상이 되어버린 죄악... 고의로 저지른 죄가 가장 무겁다... 난 네가 나처럼 될까봐 걱정돼. 내가 끝내 너를 나처럼 망가뜨릴까봐 불안해. 날 봐. 나처럼 되고 싶어? 나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죽게 하고... 되돌리고 싶어도 바로잡고 싶어도 자꾸만 내 과거의 잘못들이 툭툭 튀어나와 내 발목을 잡아. 난 변했는데 변하고 싶은데 다시 살아보고 싶은데 자꾸 내 과거가 턱턱 목을 조르면서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다시 행복해질 수 없다고 절망하게 해.”
해강의 나직한 목소리는 차라리 절규였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던 과거에 그녀는 많은 죄를 지었다. 수많은 사람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대가는 더욱 혹독해서 어린 딸 은솔이가 보복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남편 최진언과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도 그 사건 때문이었다. 기억을 잃고 백석과 함께 지내온 4년의 세월 동안 해강은 많이 변해서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지만, 그 이후로도 과거의 죄악은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파멸시키려고 혈안이 된 채 쫓아다닌다. 매일같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자신을 구하려다가 백석이 치명적 부상을 입는 사고까지 당하게 되자 해강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니 최소한 어떻게 살면 안 되는지를 절실히 깨닫는다. 애석하게도 자신에게는 그 깨달음이 약간 늦었다는 뼈아픈 사실까지도.
"너는 잊었나본데, 너 질투가 날만큼 눈부시게 예뻤어. 싸구려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다 터진 운동화를 신고 있어도, 맨발로 버티고 있는데도 당당하고 건강하고 예쁜 네가 난 부러웠어. 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 다시 되돌릴 수 있을 때 되돌려야 해. 나처럼 네 30대를 다른 사람 상처주는 데 쓰지 마. 모든 상처가 다 아무는 건 아니니까. 네 인생을 지켜. 너를 지켜. 제발 너는 지켜. 강설리, 나처럼 살지 마!"
도해강의 이 처절한 대사로써 드라마 '애인 있어요'의 주제가 명확해졌다. "나처럼 살지 마!" 라는 절규에는 기억을 잃기 전 과거 도해강의 모습과 그에 대한 회한이 축약되어 있다. 돈, 명예, 권력 등 그 어떤 가치도 사람보다 소중할 수는 없음을, 그 어떤 가치를 사람보다 앞세워 사람을 짓밟으며 살아간다면 그 삶의 끝에 남는 것은 오직 절망뿐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때묻지 않은 젊음의 순수함이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가! 철없던 어린 시절 우리는 사람보다 앞서는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조금씩 때가 묻어가며, 세상에는 의외로 사람을 짓밟는 다른 가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다른 가치가 사람보다 귀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건만, 비뚤어진 세상은 한없이 순수했던 젊은이의 가슴속에 비뚤어진 마음을 심어주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비뚤어진 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걷다 보면 어느 덧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음을 깨닫는다. 해강의 말처럼 '모든 상처가 다 아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생각보다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 서지 않기 위해서는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해강은 말한다. 실수는 할 수 있지만 고의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죄를 지었더라도 너무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한다고,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며 자신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도해강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녀 앞에는 최진언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를 향한 복수가 남아 있다. 탐욕으로 인해 오랜 친구였던 독고지훈을 죽이고, 그의 발명품을 가로채고, 나중엔 그의 딸인 줄을 알면서도 해강을 며느리로 삼아 온갖 나쁜 일에 도구로 이용한 최만호의 악행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해강도 그를 용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어떤 방식의 복수를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그의 아들 최진언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에랴! 커다란 선택의 기로에 선 도해강의 앞날이 매우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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