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육룡이 나르샤' 땅새(이방지)에게 보내는 연희의 편지 본문
땅새야... 이제 너는 삼한제일검이 되었고 이성계 장군으로부터 이방지라는 새 이름까지 받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이웃집 땅새였어. 한 번도 너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벌써 오래 전에 괴물이 되어버린 내가 한 줄기 사람의 체온이나마 간직할 수 있도록 긴 세월 동안 붙잡아 준 것은 너를 생각하는 마음뿐이었지. 화사단에 들어가 흑첩이 되고 자일색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어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만 하며 살았겠니? 더 이상 추악해질 몸도 마음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오갈 데 없는 괴물이지만, 그래도 너를 생각할 때만은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흐르며 사람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
나는 수천 수만 번을 생각했었지. 헤어지던 날... "꼴도 보기 싫다"며 발악하듯 외치는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네 모습을... 차마 울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하고, 뛰어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꼼짝없이, 죽음보다 괴로운 시간을 견뎌내고 있던 네 모습을 생각했지. 어쩌면 너는 나보다 더 아팠을 거라고, 나중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몇 번이나 말해주고 싶었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네 탓이 아니라고, 너의 죄가 아니라고... 너는 단지 힘없는 소년이었고, 나는 그런 너를 사랑했고... 내 운명이 고달파서 홍인방의 가노들에게 몸을 더럽혔지만, 너를 미워한 적은 없었어.
힘없는 너를, 마음약한 너를, 겁많은 너를, 독하지 못한 너를 나는 좋아했어.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다 보니 다들 독하고 억세게만 변해가는데, 그냥 바보처럼 순하고 착하고 여린 네가 나는 참 좋았어. 혼자 놔두면 제 밥그릇도 못 찾아먹을 것 같으니 내가 항상 곁에서 챙겨주고 싶었어. 땅새야, 내가 꿈꾸던 삶도 원래는 분이와 다르지 않았어. 풀냄새 가득한 우리 고향에서 함께 농사지으며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귀족들에게 곡식을 많이 뺏기더라도 우리 식구들 굶어죽지 않도록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것 없이 그렇게 너와 함께 늙어가고 싶었어. 다른 삶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살아 있다면 언젠가 볼 날도 있겠지, 했어. 흐르고 흐르다 보면 만나지는 날도 있겠지, 했어. 우리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만, 만나게 돼도 모르는 척 햇으면 해. 흐르고 흐르다 만났으니, 그냥 흘러가자!" 수천 수만 번을 연습했던 말... 혹시라도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절대 눈물 흘리지 않고 절대 화내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해야지... 그리고 너를 만났어. 수천 수만 번을 생각했는데도 가슴이 너무 떨려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어. 하마터면 울 뻔했고, 어쩌면 화를 낼 뻔했어. 아무 이유 없이 네 가슴에... 하지만 결국 해냈어. 독하게, 괴물답게.
땅새야, 난 그렇게 살았어. 점점 더 독하게, 인간다운 감정이라곤 하나도 남김없이 말려버리려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어. 이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거든. 어린 내 소박한 꿈을 산산이 짓밟은 이 세상을 나는 갈아엎고 싶었어. 그 이후에 뭘 어떻게 할 건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목표를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무심결에 생각했는지도 몰라. 너를 생각할 때를 빼곤, 내 가슴속엔 온통 복수심만 가득했어. 백성을 위해서라는 삼봉 선생의 말씀에 감화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더 컸어. 귀족들은 물론 그 못된 가노들까지, 모두 짓밟아 죽여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너를 다시 만나고 분이를 다시 만나면서,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했어. 열린 문틈으로 따뜻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야. 땅새야, 어쩌면 좋을까? 벌써 괴물이 된지 오래인 내가 다시 사람처럼 살고 싶어졌으니, 감히 꿈을 꾸고 싶어졌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안 될 일이지. 이렇듯 독하고 황폐해진 마음으로 또 다시 누구를 끌어안고, 누구에게 기대며 살아가겠어? 내 품에 안긴 누군가는, 나에게 어깨를 내어준 누군가는 분명 내 가시에 찔려 다치게 될 거야. 나 때문에 불행해질거야.
땅새야, 난 너를 지켜야 해... 오래 전에는 네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나로부터 너를 지켜야 해. 더 이상 나 때문에 다치지 않도록, 불행해지지 않도록 너를 꼭 지킬 거야. 까치독사가 되어버린 너를 보며 나는 마음이 아팠어. 그렇게 약하던 네가, 겁많던 네가, 티없이 여리고 순하던 네가, 사람을 죽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냉혈의 까치독사라니... 삼한제일검의 명예로운 칭호도, 귀족처럼 고급스러운 이방지라는 이름도, 나는 별로 달갑지 않아. 이렇게 변하기까지 네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네가 견뎌야 했을 그 통한의 시간들이 처연할 뿐이야. 다시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마지막 꿈을 꾸고 싶어. 네가 행복해지는 꿈... 그리웠던 여동생 분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오순도순 농사짓고 살아가는 네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 언젠가 네 가슴속에서 내 그림자가 희미해질 때쯤이면, 맘씨 곱고 순한 색시도 얻어 서로 기대며 살아. 험난했던 지난 일일랑 모두 한바탕 꿈이려니, 그 꿈 속에서 언뜻 보았던 내 모습은 부질없는 환영이려니, 그렇게 여기며 깨끗이 잊고 살아. 이 소망이 꼭 이루어지도록 나는 죽는 날까지 매일 기도할 거야. 하지만 땅새야... 나에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 같이 가겠느냐고, 너랑 분이랑 고향에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봐 줘서... 그거면 충분해 땅새야,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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