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응답하라 1988' 최택(박보검)에게 빠지다 본문
초반에는 좀처럼 재미를 붙일 수 없었던 '응답하라 1988'에 뒤늦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최택'이라는 특별한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다. 어쩌면 '최택'이라는 캐릭터에 영혼까지 동화된 듯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박보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응답하라 1988' 10회에서 비춰진 최택의 모습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다이아몬드 같았다고나 할까? 가만히 있어도 눈부신 다이아몬드가 숨쉬고 말하고 웃고 뛰어노는 모습을 본다면 그런 기분일 것 같았다. 행여 다칠까봐 (흠집이라도 생길까봐) 염려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신기하고 황홀해서 눈을 뗄 수 없는, 뭐 그런 느낌이었다.
8살 때부터 천재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바둑 신동 최택. 그는 겨우 18세의 약관에 세계적인 스타 바둑기사로서 대한민국의 국보급 존재가 되었다. 국제대회 참석을 위해 그가 움직일 때면 기본 3~4명의 비서(?)가 따라붙고, 백발이 성성한 원로들까지도 '최사범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존대를 한다. 그만큼의 위상을 갖춘 인물이라선지, 어딘가 또래보다 성숙하고 일찍 철든 듯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바둑을 제외하면 거의 아는 것이 없기에, 최택은 오히려 '뇌섹남'보다 '뇌순남'에 가깝다. 아이큐 139의 천재임은 확실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도 8세 어린아이처럼 대책없이 순진하고 해맑을 뿐이다.
박보검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과연 '최택'의 매력을 이만큼 살려낼 수 있었을까? 박보검은 일단 외모에서 '소년'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실제 나이도 어리지만 (23세) 캐릭터 때문인지 그보다 훨씬 더 어린 느낌이다. 커다란 눈망울과 늘어뜨린 앞머리, 가냘픈 어깨와 손목의 움직임은 여성 시청자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한다. 저절로 안스러운 마음이 치솟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불안해 보이는... 하지만 놀랍게도 그 연약한 소년의 실체는 남들이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업적과 명성과 재산을 이미 자기 능력으로 모두 이루어낸 인물이다. 이 극렬한 모순에서 최택의 특별한 매력이 발생한다.
사실 나는 칭찬 일색인 '응답하라' 시리즈에 남들만큼 열광하지 못하는 편이다. 유일하게 완주했던 '응답하라 1994'에서도 칠봉이(유연석)가 조금 좋았을 뿐 다른 캐릭터들이나 스토리에는 거의 몰입하지 못했다. '응답하라 1997'은 남들이 하도 좋다기에 뒤늦게라도 볼까 했는데, 2~3회 정도 보고는 당최 끌리질 않아서 포기했다. 심지어 현재 절찬리에 방영중인 '응답하라 1988'도 초반 3회까지 보고는 재미가 없어서 접을까 했었다. 하지만 남들이 하도 좋다하니 나도 어떻게든 그 감정을 좀 느껴보고 싶었고, 더욱이 요즘 볼만한 드라마도 거의 없는지라 꾸역꾸역 시청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9회에서 중국을 배경으로 최택의 눈부신 활약이 펼쳐지고, 곁에서 그를 살뜰히 챙기는 여주인공 성덕선(혜리)의 속깊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나는 부쩍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을 때 덕선의 어깨를 확 끌어당겨 안는 상남자 면모까지 보여주니, 도무지 최택이라는 캐릭터는 양파처럼 시시각각 새롭고 아련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10회에서 가출한 동룡이를 붙잡아 오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찾아간 대천 해수욕장 씬을 보며, 내 가슴은 결국 최택의 존재로 가득 채워지고 말았다. "조오기, 까까먹는 애랑 까까 뺏어먹는 애!" 라는 성보라의 말 한 마디로 최택과 성덕선은 단둘이 낙오하게 되는데...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덕선과 함께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최택의 모습에서 행복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 만큼이나 찬란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성덕선의 남편은 김정환(류준열)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2015년 현재 성덕선과 그 남편 역할은 이미연과 김주혁이 맡고 있는데, 김주혁의 틱틱거리는 말투 등은 김정환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최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스타일이라 고민해 볼 여지조차 거의 없다. 따라서 대천 해수욕장에서의 한 때는 이루어지지 못할 최택의 첫사랑을 위로하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최택의 캐릭터는 특별히 러브라인을 더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환 캐릭터는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정우)와 같은 포지션으로, 처음부터 정해진 남편감이었다. '응답하라' 제작진이 (아마도 이우정 작가가) 그런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다소 투박하며 다정한 표현 등은 잘 못 하지만, 속마음은 아주 깊고 따뜻하며 진중한 남자... 훌륭하긴 한데, 유감스럽게도 내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다. 나는 아무리 다시 봐도 '응사'의 칠봉이나 '응팔'의 선우(고경표)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표현을 아끼지 않는 남자가 좋다. (물론 적절한 상황에서는 박력도 있고 ㅎㅎ) 사실 남자로서의 매력은 최택보다도 선우 쪽이 앞선다. 그러므로 '응팔'의 최대 행운녀는 선우의 그녀 성보라(류혜영)다.
하지만 선우의 캐릭터가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데 반해, 최택의 캐릭터는 지극히 새롭다. 이제껏 거의 본 적 없는 새로운 인물인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진귀한 보석이나 예술 작품이 살아 숨쉬며 움직이는 것을 보는 듯한 기분인데, 남녀간의 야릇한 감정과는 다르지만 그 못지 않게 강렬한 설렘과 몰입을 선사한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황홀해지며 신비한 감동에 젖어든다. 때로는 왠지 안타까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항상 그 아이가 아프지 않기를, 밥 굶지 않기를, 잠 설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택이 아빠가, 동네 어른들이, 친구들이 모두 그렇듯이 시청자들도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택이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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