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응답하라 1988' 남편은 최택, 김정환을 향한 안타까움이 컸던 이유 본문
'응답하라 1988' 여주인공 성덕선(혜리)의 길고 길었던 남편찾기가 뜻밖에도 19회에 완결되었다. 최종회인 20회에 이르러서야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입장에서는 그 빠른 선택 자체가 일종의 반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반전은 줄곧 성덕선 미래의 남편을 김정환(류준열)일 거라고 예상하게끔 스토리를 끌어와 놓고서, 마지막에 급격히 최택(박보검) 쪽으로 선회해 버린 제작진의 뒤통수치기였다. 개인적으로 김정환보다 최택의 캐릭터를 훨씬 더 좋아했기 때문에 이 결말 자체에 불만은 없으나, 급선회하는 과정만 놓고 보자면 많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덕선과 그 남편의 2015~2016년 현재의 모습은 배우 이미연과 김주혁을 등장시켜 보여주고 있었는데, 18회 이전까지 김주혁의 말투와 행동 등은 영락없는 김정환의 중년 버전이었다. 더욱이 김주혁과 류준열의 일체감은 회가 거듭할수록 짙어져서, 얼굴이 약간 길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닮은 곳 없는 두 사람의 외모마저 점점 더 비슷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18회부터 갑자기 김주혁의 캐릭터가 달라졌다. 틱틱거리던 말투를 완전히 버린 채, 한없이 순하고 온유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환의 내유외강(內柔外剛) 스타일에서 최택의 외유내강(外柔內剛) 스타일로 급변화된 김주혁의 모습에 그 누구라도 쉽게 적응할 수는 없었다.
그 동안 덕선을 향한 정환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은 수많은 시청자들을 애태우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극 초반부터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이라는 말까지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결말이 다가올 때까지 두 사람의 러브라인은 당최 진전될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덕선의 남편이 꼭 정환이라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류준열과 김주혁의 이미지도 비슷하거니와, 너무 특별한 천재바둑기사 최택보다 이웃집 오빠처럼 평범한 정환이가 왠지 '응답하라'의 남주인공에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전작인 '응답하라 1994'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칠봉이(유연석)가 아니라 답답해 보일 정도로 표현하지 못했던 쓰레기(정우)가 결국 성나정(고아라)의 남편이었던 사실 또한 츤데레 스타일 김정환 쪽에 가능성의 무게를 실어 주었다. 그래서 '어남류' 지지자들은 "비록 지금은 답답하게 머뭇거리고 있지만, 머지 않아 꼭 터프하게 덕선이를 안아 줄거야!" 하며 꿋꿋한 믿음으로 기다려 왔던 것이다. 모처럼의 용기 낸 고백조차 장난처럼 얼버무리고 말았던 그 가슴아픈 장면에서조차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답답했던 만큼 마지막에는 꼭 반전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의 선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의 반전이었다.
'어남류'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김정환을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응팔'이 김정환의 감정과 시선에 따라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자는 모두 알고 있었다. 정환이 얼마나 덕선을 사랑하는지, 사람 많은 버스에서 그녀를 지켜주려 얼마나 혼자 애썼는지, 그녀의 선물을 형에게 줘버렸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한 마디 해명조차 못하며 얼마나 억울했는지... 급기야 18회에서는 정환의 나레이션까지 등장했다. 그러니 정환의 애타는 마음을 잘 아는 시청자는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 99.9%는 김정환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데, 뜻밖에도 제작진은 0.1%의 예외적이고도 새로운 선택을 했다.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서 '연적'의 포지션을 담당한 줄만 알았던 최택이 '응팔'의 남주인공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김정환에 비해 최택의 캐릭터는 러브라인보다도 개인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인기를 확보한 케이스였다. 주변에서 절대로 흔히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인물, 국보급 천재 바둑기사, 어린 나이에 벌써 천문학적인 액수의 상금을 벌어들인 세계적 스타, 하지만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바둑에 정신을 소비해 왔던 그의 신체적 건강은 결코 좋아 보이질 않는다. 극도의 긴장 속에 살아가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져선지 수면제 없이는 거의 잠들지도 못하는 지경이다. 애처롭게 여윈 몸과 아이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여성 시청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그 연약한 소년의 몸으로 어른들의 치열한 세상에서 홀로 버텨내고 있는 택이를 꼭 지켜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최택의 매력은 단지 천재성만이 아니다. 일단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은 좋은 성격을 갖기가 어려운데, 최택은 신기할 만큼 온순하고 착하고 배려심이 깊다. 자기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기도 쉬울텐데 그러기는 커녕 극성스런 친구들의 짖궂은 장난까지 모두 웃으며 받아주고, 심지어는 어른들의 일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서 회식비를 내준다든가 친구 아버지의 수술을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남몰래 돕는 등 속 깊은 행동을 한다.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다.
연약한 외모와 달리 사랑 앞에서 솔직 과감하고 터프해지는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최택이 친구들 앞에서 자기 감정을 여과 없이 털어놓을 때, 어린애처럼 순수한 그의 내면에는 아무런 망설임조차 없었다. 덕선에게 자기 감정을 들킬까봐 움츠리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자며 선뜻 데이트 신청을 했고, 사진을 찍을 때는 과감히 어깨를 당겨 끌어안기도 했다. 다리를 다친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깡마른 몸으로 운동장을 질주하던 모습에서는 의외의 강인함이 느껴졌고, 잠결이었지만 거리낌없이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던 장면은 시청자에게 최고의 로맨틱한 선물이었다. 홀로 추위에 떨고 있을 그녀를 위해, 대국에서 생전 처음으로 기권패를 선언하고 달려가던 모습에서는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희생적 사랑의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1988~1989년 그 시대에는 말없는 무뚝뚝함이 대세였을지 모르나, 2015~2016년 현재는 분명하고 솔직한 표현이 대세다. 김정환이 끝없이 머뭇거리는 동안 성큼성큼 다가서는 최택의 모습에 '어남류' 지지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답답함보다는 솔직함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처럼 최택의 개인적인 매력에 푹 빠져버린 시청자도 있겠지만 그보다 좀 더 많은 수의 시청자들은 김정환을 응원했던 듯한데, 어쩌면 그 이유는 '평범함'으로 인한 '몰입' 때문인 것도 같다. 하늘의 찬란한 별처럼 멀리서 쳐다보기는 황홀하지만 가까이 다가서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좀 비현실적인 최택보다, 어딘지 자기 자신 같기도 하고 옛 친구 같기도 한 정환의 평범함에 감정이 몰입되어 응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하지만 결국 사랑에 굶주렸던 둘째딸 여주인공 성덕선은 자기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와주는 최택의 손을 잡았다. 김정환을 응원하던 입장에서는 안타깝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드라마 속의 일이지만 어차피 인연은 따로 있는 법이니까, 정환에게는 덕선보다 더 잘 어울리는 다른 짝이 나타날 것이다. 낚시밥을 회수하고 반전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제작진의 미숙함이 드러나 좀 부자연스럽게 되어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여전히 김주혁에게서는 최택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음..;;) 어쨌든 벌써 세번째를 맞이한 '응답하라' 시리즈로서는 자기 복제의 덫을 벗어나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주인공 커플의 과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최종 20회에 남은 것은 김정환과 유동룡(이동휘)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와 성보라(류혜영) 성선우(고경표) 커플의 결말이다. 다른 캐릭터와 달리 이제껏 선우 캐릭터는 그 성씨가 밝혀지지 않아서 약간 의아했었는데, 알고 보니 성보라와 동성동본이라는 비밀이 숨어있었던 듯하다. 이것도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겠는데, 좀 어색하지만 대충 그러려니 하고 있다. 성덕선과 최택은 두 캐릭터의 이름자를 합쳐 '선택' 커플이라 불려왔다. '선택'이라니, 그 단어 자체부터 매우 특별하게 반짝거리지 않는가! 선택 커플의 예쁜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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