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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척사광의 서글픈 사랑과 운명 본문

드라마를 보다

‘육룡이 나르샤’ 척사광의 서글픈 사랑과 운명

빛무리~ 2016. 2. 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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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36회에서 드디어 선죽교가 정몽주(김의성)의 피로 물들었다. 어떻게 될 줄을 모두가 알면서도 손꼽아 기다려 온 ‘피의 선죽교’ 그 명장면이 드디어 방송된 것이다. 이방원(유아인)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구태의연한 시조 형식이 아닌, 새로운 해석을 곁들여 대사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김의성과 유아인의 명연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명장면을 감상하면서도 나의 가슴이 울리지는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표현되는 ‘하여가’에 김영현 작가는 ‘백성’의 존재를 대입시켰다. 이방원의 원래 시조가 “우리끼리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면 되지, 나라가 바뀌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 손잡고 한 번 잘 살아봅시다!” 이런 느낌이라면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해석은 “어떻게든 백성을 잘 살게 해주면 되는 거지, 허울 좋은 명분 따위가 뭐 중요하오? 어느 것이 더 올바른 정치인지 잘 생각해 보시오!” 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왕씨의 고려든 이씨의 조선이든, 백성의 실제 삶과는 별 상관이 없다. 깨끗한 정치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만 해주면 백성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들먹이는 이방원의 주장에 몰입되지 않았던 이유는 '피의 군주' 이방원의 행보 자체를 결코 '백성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너무 썩은 그릇이라 새 그릇이 필요했다는 말은 그럴 듯하지만, 스스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자기 형제를 세 명이나 죽이고 나중에는 혹시나 왕권을 위협할까 싶어 처가와 사돈의 집안을 억울하게 몰살시킨 이방원의 행위가 어찌 '백성을 위한 것'이겠는가? 아무리 봐도 권력욕의 화신 이방원에게는 '하여가'의 원래 해석이 더 잘 어울린다. 


일편단심 충절을 부르짖는 정몽주에게도 별로 공감할 수는 없었다. '임금' 또는 '왕조'에 대한 충성이 그 당시에는 절대적인 가치였을지 모르나, 현대에 와서는 아무런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권은 수시로 바뀌는 게 마땅하며, 장기집권은 곧 독재이자 죄악인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왕조를 향한 정몽주의 일편단심이 가슴 절절하게 와닿을 리 없다. 어쨌든 자기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 바친 사내의 뜨거운 최후이긴 했지만... 


사실 나는 기대가 컸던 만큼 '육룡이 나르샤'에 실망이 크다. 너무 강해져 버린 '목표'가 인물들의 '감정'을 온통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물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 백미를 이루었던 명작 '선덕여왕'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뿌리깊은 나무' 때까지만 해도 김영현 작가의 인물들은 생생히 살아 있었다. '한글 창제'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서도 세종과 소이와 강채윤은 서로 사랑했고 강렬하거나 은은한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무채색의 목표에 감정이라는 색채를 입혀 주었다. 그런데 '육룡이 나르샤'의 인물들에게서 '조선 건국'이라는 목표 의식을 배제한다면 남는 게 뭘까?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마치 목표만을 향해 움직이는 사이보그 같다. 이방원과 분이(신세경)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잡아낼 수가 없다. 분이를 좋아하는 것 같던 이방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민다경(공승연)과 혼인해 버렸고, 분이 역시 너무나 쿨하게 방원의 그런 결정을 받아들였다. 둘 다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고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목표에 좀 더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그까짓 정략결혼쯤이야 백 번인들 대수롭겠는가 하는 태도였다. 그나마 이방지(변요한)와 연희(정유미)의 멜로가 좀 가슴아프게 그려지나 싶었지만 그조차도 흐지부지 잊혀져가는 추세다.



 

거창한 대의보다 소소한 감정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육룡이 나르샤'에 몰입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모처럼 내 가슴을 아프게 울리는 캐릭터가 나타났다. 바로 곡산검법의 후계자이며 공양왕의 마지막 연인인 척사광(한예리)이 그러하다.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척사광이라는 인물은 강력한 경계의 대상이었으며, 왠지 모르게 악의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삼한제일검 이방지와 조선제일검 무휼(윤균상)이 든든한 아군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척사광은 그들이 타도해야 할 최대의 난적으로 등장하리라는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정체를 알고 보니 척사광은 더없이 가련한 여인에 불과했다. 장삼봉의 제자를 죽였다 해서 냉혈한 검객인 줄 알았지만, 척사광은 부당한 공격을 맞이하여 최선의 방어를 했을 뿐이었다. 무사의 더러운 호승심에 사로잡혔던 장삼봉의 제자는 조용히 은거하고 있던 척사광의 할아버지를 찾아내어 막무가내로 대결을 강요했고, 마지못해 대결에 나섰던 척사광의 조부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에 도취했던 장삼봉의 제자는, 할아버지의 처참한 시체 앞에서 울부짖던 어린 소녀에게 곧바로 목숨이 거두어지고 말았다. 비운의 천재 검객, 척사광의 첫 살인이었다. 



불행히도 척사광은 무사의 재능을 타고났으되, 무사의 마음은 지니지 못한 인물이었다. 싸움을 혐오하고 살인을 끔찍해하는 여린 심성의 그녀로서는 차라리 평범한 여인의 삶이 어울렸겠지만, 특출한 재능을 지녔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외롭고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공양왕이 어루만지며 깊은 사랑을 주자, 척사광은 주저없이 그 위험한 사랑에 온 몸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랑은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척사광은 사랑 때문에, 그토록 기피해 온 싸움과 살인을 스스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평화를 갈망했지만, 끝내 그녀의 운명은 평화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누가 정의로운지, 누가 옳고 그른지,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공허하고 처연한 척사광의 눈빛이 내 가슴을 울렸다. 사실 저마다의 입장에서 보면 저마다의 당위성이 있는 법이니, 섣불리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 힘든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 그 부분을 명료히 지적한 척사광의 대사였다. 순진무구한 정의로움에 불타는 무휼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정의'와 '백성'을 앞에 내세워 연막을 치고 있을 뿐 그들의 싸움은 90% 이상이 추악한 권력 다툼에 불과한 것이니, 진실을 꿰뚫어 본 사람은 오직 척사광뿐인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검술을 지녔으나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고, 상처를 입어 본 경험이 없어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게다가 살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여린 마음을 가진 척사광이 홀로 삼한제일검 이방지와 조선제일검 무휼을 상대할 때, 그 왜소한 몸으로 덩치 큰 두 사내를 막아내려 고군분투하는 척사광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분명 이방지와 무휼이 아군인데, 그들이 걱정되지 않고 오히려 적군인 척사광이 걱정되었다. 그녀의 애달픈 운명이 너무도 가련할 뿐이었다. 


무휼과 척사광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졌으나 용케도 살아남았다. 짐작컨대 척사광이 절정의 무예로 낙하 속도를 늦추었기 때문인 듯 싶다. 그러나 심한 출혈과 더불어 힘을 많이 쓴 탓인지 척사광은 혼절해 버렸고, 먼저 깨어난 무휼은 그녀의 숨통을 끊으려다가 포기한 채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만다. 이제 비운의 망국군주 공양왕을 사랑하는 척사광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비록 짧은 등장이었지만, 척사광의 존재는 온통 메마른 땅에 모처럼 흩뿌리는 빗줄기처럼 반가웠다. 목석들 사이에 홀로 살아 숨쉬는 사람처럼,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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