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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약간 촌스러운 사랑 이야기라도 나쁘진 않았다. '첫사랑과의 재회' 스토리가 식상해질 때도 됐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제 질렸다. 제발 그만 우려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줄 모르고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상대의 부모가 내 부모를 죽인 원수였다는 이야기, 하긴 갈등의 최고점을 찍기엔 더 이상의 소재가 없을 것이다. 웬만한 장애물쯤은 너끈히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 해도 제 부모를 죽인 원수의 자식이라면 쉽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 설정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다. 하지만 설정하기는 쉬워도 풀어나가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솔직히 그런 경우 깔끔한 해결책은 한쪽이 (또는 둘 다) 죽어버리거나 헤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작가들은..
지금껏 오혜원(김희애)의 삶에 순수란 없었다. 오직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진대,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는지, 음대 재학 시절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재원이었던 오혜원은 건초염 악화로 꿈을 접으면서부터 예고 동창 서영우(김혜은)에게 달라붙어 그 집안의 시녀가 되었다. 서한그룹 회장인 아버지 그늘에서 보호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살아 온 서영우는 걸핏하면 오혜원의 뺨까지 때리면서 모욕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길 만큼 혜원의 가슴은 무디어진지 오래다. 상처받기 쉬웠던 예술가의 여린 감성은 어느 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혜원..
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가 이제 최종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39회를 시청하면서 나는 첨예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여주인공 오은수(이지아)에게 그닥 공감은 못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의 횡포는 참을 수가 없었다.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고, 싫어도 꾹 참고 뱃속 아기의 아버지인 김준구(하석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또는 한 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은수를 위한답시고 나서는 그들의 행동은 명백한 오지랖이며 횡포에 불과했다. 오은수는 자기가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는 '세결여'의 첫 리뷰에서 오은수의 재혼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
내가 2013년 한 해 동안 혼이 쏙 빠지게 몰입하며 보았던 드라마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인 : 아홉 번의 시간 여행' 2편이었다. '너목들'에서는 남주인공 박수하(이종석)의 매력에 홀려 정신을 못 차렸다면 '나인'에서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여행의 결과를 궁금해하느라 매 순간 가슴을 졸이곤 했다. 어느 덧 '나인'이 방송된지도 1년이 넘어가는데, 요즘은 그렇게 내 마음을 강렬히 사로잡는 작품이 없다. 원래는 '신의 선물'에 가장 큰 기대를 걸었었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나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었다. 구성이 너무 복잡 산만하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추리할 것이 너무 많아서, 정작 딸 샛별이(김유빈)를 향한 김수현(이보영)의 뜨거운 모성은 정신없는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린 느낌이..
요즘 안방극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고 괜찮았던 작품 '제왕의 딸 수백향'을 조기종영하면서까지 하루빨리 방송하고 싶어했던 드라마라면 어느 정도는 기대를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오산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 서윤주 역을 맡은 탤런트 정유미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녀 때문에도 제발 괜찮은 작품이기를 바랐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한 조각 희망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식상한 설정들, 이제껏 각종 한국 드라마 속에서 마르고 닳도록 수없이 보아왔던 이야기... 1~2회만으로 평가할 때 '엄마의 정원'은 한 마디로 클리셰의 집합소라 할만하다. 주연 배우들의 이미지는 상큼하고 연기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되어 나갈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그들에게 있어 '참 좋은 시절'이란 언제였을까? 동석이랑 동옥이랑 해원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직은 동옥이가 머리를 다치지 않아서 영리한 꼬마 소녀였을 때, 그들은 모두 티없이 행복했을까?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 장소심(윤여정)에게는 언제가 '참 좋은 시절'이었을까? 아직 큰아들 동탁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남편 강태섭과의 꿈 같은 신혼 3개월이 가장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들의 '참 좋은 시절'은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너무 잘 생겨서 마음을 애태우던 남편은 고작 3개월을 살고 집을 나가더니 첫아들이 태어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돌아오던 발걸음도 동옥이 동석이가 태어난 후에는 뚝 끊겨 버렸다. 이제는 장소심의 인생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싶을 ..
초중반 부진을 면치 못하던 김수현 작가의 최신작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의 뒷심이 발휘되고 있다. 근소한 차이긴 하지만 시청률 면에서도 경쟁작 '황금무지개'를 앞섰고, 대중적 화제성도 높아졌다. 그런데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여주인공 오은수(이지아)도 아니고 남주인공격인 정태원(송창의)이나 김준구(하석진)도 아니다. 놀랍게도 주변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한 한채린(손여은)이 밤낮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뜨거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한채린의 캐릭터는 독특하고 신선하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한채린을 악역이라 규정짓고 악녀라 부르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다. 악역이라면 최소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갖추고 있어야..
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긴 대다수 시청자들의 마음은 억지스러워도 해피엔딩을 원했을 테지만,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 드라마에 깊은 애착을 품었던 내 마음은 오히려 슬퍼졌다. 왜일까? 나는 평소 사극의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는데, 유독 '제왕의 딸 수백향' 에만 꼼꼼한 고증과 역사 재현을 바랐던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역사적 기록과 드라마 내용의 일치가 아니라, 제목과 주제에 걸맞는 엔딩이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제목과 주제에 어긋나는 엔딩을 맞이한다면, 화룡점정을 찍으려다가 그림을 아예 망쳐버리는 셈이니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이 흔히 있으랴! '제왕의 딸, 수백향' 이라는 제목은 바로 주인공 설난(서현진)의 운명과 일치되어 있었다..
1~2회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신의 선물-14일'은 3~4회에서도 복잡하고 산만한 느낌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곳곳에 크고 작은 옥에 티가 난무하며 몰입을 방해했다. 예전에 아무리 깡패 여고생이었다지만 지금은 여리여리한 모습의 방송작가인데, 젊은 남자들과 맞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김수현(이보영)의 엄청난 몸싸움 실력에는 그저 실소만 나올 뿐이다. 또 약간은 본질에서 빗나간 이야기지만, 여주인공의 이름을 '김수현'이라고 지은 것은 실수였던 것 같다.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신의 선물' 주인공 김수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별그대'의 청춘스타 김수현, '세결여'의 드라마 작가 김수현... 두 사람 모두 현재 열렬히 활동하고 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장혜성'이라..
108부작으로 조기종영이 결정된 이후 '제왕의 딸 수백향'은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 애초 예정이던 120회에서 무려 12회가 축소된 만큼 스토리 진행이 빨라지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으나, 요즘 같아서는 이토록 재미있고 수준 높은 작품을 시청률 때문에 조기종영한다는 사실이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어중간한 밤 9시대의 드라마치고 10%를 넘기는 시청률이면 그리 낮은 편도 아닌 듯한데, 황금 시간대인 10시 타임의 수목드라마들도 현재 10% 내외의 시청률로 고만고만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굳이 '수백향'을 조기종영하면서까지 후속작을 빨리 내보내겠다는 방송사의 고집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 수백향인 언니 설난(서현진)을 대신하여 공주 노릇을 하던 설희(서우)는 결국 정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