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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결여' 오은수(이지아)를 몰아붙이는 사회의 횡포

빛무리~ 2014. 3. 30. 06:41

 

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가 이제 최종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39회를 시청하면서 나는 첨예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여주인공 오은수(이지아)에게 그닥 공감은 못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의 횡포는 참을 수가 없었다.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고, 싫어도 꾹 참고 뱃속 아기의 아버지인 김준구(하석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또는 한 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은수를 위한답시고 나서는 그들의 행동은 명백한 오지랖이며 횡포에 불과했다. 오은수는 자기가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는 '세결여'의 첫 리뷰에서 오은수의 재혼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며 그녀의 선택을 비판했다. 오은수는 김준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 남자의 조건에 혹해서 결혼했다.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슬기(김지영)를 매정하게 떼어 놓으면서까지 두번째 결혼을 감행할 때, 그녀의 마음 속 우선순위는 어린 딸자식보다 재벌가 며느리라는 폼나는 위치였다. 나중에 데려가려고 했다면서 변명해봤자 소용없다. 슬기를 데려오겠다던 약속을 김준구는 이미 그 때 어겼고, 부모의 명을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남자임을 오은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재혼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했던 잘못된 결혼이었다. 사랑도, 자기 인생도, 아이의 인생도 아닌, 돈이라는 껍데기를 선택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오은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

 

자기 인생을 우선순위로 놓느냐, 태어날 아이를 우선순위로 놓느냐,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돈이나 조건 따위를 우선순위에 놓는다면 그것은 욕 먹을 짓이지만, 아이보다 자기 인생을 선택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엄마의 인생도 아기의 인생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손톱 만큼도 김준구를 신뢰할 수 없는데, 사랑하려고 노력해 볼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소리마저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다녀야 하는 그 숨막히는 시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면 그것은 오은수의 인생 전체를 말려 죽이는 일이다. 김준구의 불륜녀 이다미(장희진)는 반드시 이혼하겠다는 오은수의 결단을 자존심 때문이라고 단언했지만, 사실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면 살아도 죽은 거니까.  

 

누구도 오은수에게 자기 인생을 버리고 엄마로서만 살기를 강요할 수 없다. 선택은 오직 그녀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출산 날짜가 다가올수록 오은수를 향한 주변의 압력은 점점 더 심해진다. 김준구는 아직도 그녀와의 재결합을 포기하지 못했고, 시부모는 태어날 아이를 볼모삼아 그녀를 옭아매려 한다. 시부모와 겨룰 수 없음을 직감한 은수는 피눈물을 삼키면서도 짐짓 쿨한 척 아이를 보내기로 하는데, 엄마로서의 인생보다 자기 인생을 선택한 그녀를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다. 어린 딸 슬기마저 "엄마가 또 이혼하면 아기가 불쌍해지니까, 엄마는 아저씨랑 아기랑 함께 살면 좋겠다" 라고 말해서 은수의 가슴을 찢어 놓는다. 친정 어머니까지도 김준구를 한 번만 더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고 눈물 흘리며 은수를 설득한다. 여기까지는 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슬기 아빠 정태원(송창의)의 오지랖은 정말이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그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오은수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김준구와의 재결합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슬기가 걱정해. 엄마가 자기 때문에 아저씨랑 이혼하는 거 아니냐고.." 이렇게 시작해서 한 마디쯤 부드럽게 권유해 보는 정도였다면 화가 치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태원은 지나치게 선을 넘었다. "너는 항상 너만 생각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번에도 기어이 그 빌어먹을 고집대로 하겠다는 거야? 내 말 들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 번 해 봐. 당신 자신을 포기해, 죽여버려. 나를 죽이면 새로운 다른 내가 살아나..." 당신 자신을 포기하고 죽여 버리라니, 도대체 그가 뭔데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정태원은 두번째 아내 한채린(손여은)의 불행한 과거를 알고는 그녀와 이혼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다시 받아들였다. 그 갑작스런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시청자도 많았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정태원은 유달리 책임감이 강하고 측은지심이 깊은 캐릭터라서 오히려 그게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정태원의 넓은 마음씨에 감동한 채린은 최선을 다한 사랑으로 보답하고 있는 중이며, 현재 태원과 채린의 부부생활은 원만해 보인다. 한채린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측은지심과 책임감으로 그녀를 받아들인 정태원의 선택은 자기 희생이었다. 그렇게 자기를 죽인 후 정태원은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행복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그랬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오은수의 경우는 정태원의 경우와 현격히 다르다. 한채린은 정태원의 포용으로 변화될 수 있는 여자였지만, 김준구는 오은수의 희생으로 변화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지금이야 오은수가 이혼을 고집하고 있으니까 다시 붙잡으려고 기를 쓰는 것뿐이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지도 않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절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엄마한테 혼나고, 마누라는 집을 나가고, 태어날 아들은 엄마 없는 아이가 될 것 같으니까 똥줄이 탈 뿐이다. 만약 오은수가 한 번만 더 꾹 참고 봐주자는 생각으로 그의 곁에 돌아가면, 과연 김준구는 성실한 가장이 될 수 있을까? 마누라는 집에 들어앉아 아이 키우느라 정신이 없고, 부모님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손주 보는 재미에 푹 빠지신다면, 사방의 경계가 느슨해진 사이에 또 한눈을 팔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을까?

 

이다미와의 관계가 들통나 한 차례 호된 홍역을 치르고, 집 나갔던 마누라를 간신히 데리고 들어와 아직 화해도 못 한 상태에서 다시 이다미를 만나 얼레리 꼴레리 했던 놈이다. 설령 이다미를 확실히 정리했다고 해도 김준구의 인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김수현의 2000년작 '불꽃'에서 이영애의 남편으로 등장했던 차인표의 캐릭터를 김준구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차인표는 진심으로 이영애를 사랑했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불행한 남편이었고, 김준구는 쉽게 꺾이지 않는 꽃 오은수를 욕망 때문에 기어이 꺾더니만 방구석에 처박아 놓고 한눈이나 팔고 다녔던 찌질한 놈이다. 만약 오은수가 사회의 횡포에 못 이겨 김준구와 재결합하는 것으로 엔딩 처리가 된다면, 나는 김수현 작가의 억압적 사고방식에 또 한 번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덧붙이기 : 최종회인 40회에서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오은수의 홀로서기(?)로 마무리 되었다. 갓 낳은 아들을 떼어보낸 슬픔은 독한 성격답게 빨리도 극복하고, 어린 딸 슬기는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아 키우고, 다시 방송에 복귀하여 능력있는 쇼핑 호스트로 승승장구하며 언제 울었냐는 듯 즐겁고 상쾌하게 지내는 그녀의 모습이 한편 보기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냉정해 보여서 씁쓸했다. 정태원은 임신한 아내 채린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김준구는 어린 아들 필승이를 엄마와 이모에게 맡겨둔 채 다시 이다미와 만나 끈적한 연애를 계속한다. 모든 캐릭터가 자기 생긴대로, 자기와 꼭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런 결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오은수의 세번째 결혼은 자기 자신과 한 것이라는 식의 끼워 맞추기는 억지스럽고 좀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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