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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세상 어디에도 도망친 노비가 갈 곳은 없다!" 이것은 '추노'의 대사일까요? 아닙니다. MBC에서 새로 시작된 월화드라마, 이병훈PD의 사극 '동이'의 첫방송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요즘 '추노'라는 드라마에 한동안 빠져서 지내고 있던 터라, '도망친 노비'라는 익숙한 표현을 들으니 왠지 반가웠더랍니다..^^ 사실 '동이'에서 도망친 노비나 추노꾼들은 중요한 역할이 아닙니다. 그들이 잠시 등장한 이유는 이 드라마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검계(劍契)를 인상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함이었지요. 검계는 조선후기에 실존했던 조직으로, 학자에 따라서는 민중 저항운동 세력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단순한 반양반 세력으로 본다고 합니다. 폭력을 행동강령으로 삼으며 약탈, 살인 등을 일삼고, 스스로 자기 몸에 상처..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고...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일은 드디어 포문을 열며 실행되고... 이렇게 '추노' 역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궁극적으로 중점을 두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비뚤어진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서로를 미워할 수 없는 그들의 더없이 인간적인 화해와 사랑인지,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추노'는 두 가지를 다 그려내고 있으며, 어느 쪽에 더 비중이 있는지도 시청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극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결말이 주는 여운은 많이 달라질 듯 싶습니다. 1. 외유내강한 짝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포스팅의 주제와 직접적 연관은 없음에도, 짝..
다행히도 짝귀의 산채를 향해 엄습해 오던 어두운 그림자는 일단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황철웅이 목표로 삼고 있는 이대길과 송태하가 먼저 떠났기 때문이지요. 원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산채는 들이치게 되겠지만, 그 가엾은 사람들이 속 편히 숨 쉬며 살 수 있는 시간이 적어도 하루이틀은 늘어난 셈입니다. 어느 새 언니 동생 사이가 되어버린 언년이와 설화, 그리고 귀여운 원손 아기씨도 그 평화 속에서 며칠은 더 곱게 웃을 수 있겠네요. 1. 두 남자의 이상한 동행 "예전에는 얼굴을 못 보니까 미칠 것 같더니만, 이제는 매일매일 보니까 아주 죽을 맛이야."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며 되뇌이는 대길이의 쓸쓸한 얼굴을 보니, 그 사내의 바보같은 사랑에 제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정말 그와 같은 사..
아저씨, 업복 아저씨,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저씨, 혹시 날 좋아하나요? 아저씨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잠잘 때 꿈을 꾸어 본 적이 없는데, 참 이상하죠. 난 요즘 잠만 자면 꿈을 꾸어요. 그리고 그 꿈에는 항상 아저씨가 나와요. 그 못생긴 얼굴을 해갖고는 날 보며 헤벌쭉 웃는, 그런 아저씨가 요즘 매일 내 꿈에 나온단 말이에요. 아저씨는 나에게, 좋은 세상이 오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지만, 나에겐 꿈이 없었지요. 눈 뜨면 오늘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견뎌 나가야 할 또 하루의 삶이 펼쳐져 있었고, 밤이 되면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행복해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곤 했는걸요.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겠어요? 이런 나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어요? 그래서 난 대답했지요. "내..
나는 짝귀다. 내 손으로 주먹을 가르친 아우 대길이에게 한쪽 귀를 잘린 후, 사람들은 나를 짝귀라고 부른다. 조롱하는 소리인 줄 알지만 상관없다. 뭐 귀담아 들을 소리가 있는 세상이라고 귓바퀴를 두개씩이나 달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 우리네 바닥에서는 서로 놀려대며 투닥거리는 것이 원래 친하다는 표시다. 남들이 나를 짝귀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다. 이 험상궂은 사내를 무서워하지 않고 좋아한다는 얘기다. 어차피 맨손으로 태어나 맨손으로 떠나갈 인생인데, 이 정도면 만족스럽지 아니한가! 나를 짝귀로 만들어 놓은 아우 대길이를 나는 좋아한다. 놈은 진짜 사내다. 주먹질도 발길질도 늦게 배웠으면서, 저를 가르친 언니들을 모조리 때려 눕힐 때부터 예삿놈이 아닌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놈을 ..
어쩌면 조선비의 변절은 벌써부터 명백히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큰 일을 도모함에 있어 그의 속내가 개인적 탐욕에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송태하와 의견충돌로 갈등을 빚으면서,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던 조선비의 야욕은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송태하와 조선비는 둘 다 뿌리깊은 양반의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지만, 그 방향은 여실히 달랐습니다. 송태하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대의명분이었지요. 언년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빛이 좀 바래기는 했지만, 송태하의 삶에 있어 가장 큰 목적은, 죽은 소현세자에 대한 충성으로 그가 남긴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보다는 현재의 세자인 봉림대군을 만나 뜻을 전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원손의 사면을 주청하고자 했..
언년아, 어떠하냐? 네 눈에 비친 내 몰골이 어떠하냐? 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그 옛날 풍채 고운 도령은 온데간데 없이, 반은 짐승이요 반은 사람인 괴물로 변해버린 내 몰골이 어떠하냐? 너는 내게 물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이라도 네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느냐고... 내 어찌 잊겠느냐? 네 오라비에게 칼을 맞고 불길 속에 쓰러지는 나를 뒤로 한 채 멀어져가던 네 모습은 지금까지 나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 언년아, 너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하였더냐? 네 오라비 큰놈이보다도 나는 너를 더 미워하였다. 잡아끄는 오라비의 힘을 뿌리칠 수 없었던, 연약한 너를 더 미워하였다. 언제나 감싸주고 싶던 너의 가녀린 어깨가, 언제나 꽁꽁 얼어 있던 너의 작고 차가운 손이 그지없이 미웠다. 나를 보며 아스라히 미..
제가 조진웅이라는 연기자를 알게 된 것은 최근입니다. '추노'에서 송태하(오지호)의 충직한 부하 곽한섬 역할을 맡은 것을 보고는 꽤나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더군요. 어쩐지 낯선 얼굴에 비해 연기력은 심상치 않다 싶었지요. 조진웅은 코믹배우가 아니라 정극배우임에도 특이할 만큼 뚱뚱한 체격을 지녔습니다. 그 체격 때문에 더 눈에 띄고 인상적인 면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뚱뚱한 연예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강호동을 떠올릴 것이나, 제가 보기에 강호동은 상당한 근육질이어서 뚱뚱하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우람하고 커다란 체구라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악역이나 단역 또는 코믹한 역할을 주로 맡는 배우들 중에는 가끔 뚱뚱한 사람을 찾아볼 수도 있지요. 예를 ..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의 위치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원래 악역이란 시청자들에게 미움받는 존재였으나 이제는 별로 그렇지도 않지요. 오히려 강렬한 매력과 포스를 물씬 풍기며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는 악역이 많습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도 원래는 주인공 덕만(이요원)과 대칭점에 놓이는 명백한 악역이었으나 그 엄청난 존재감은 주연을 뛰어넘어 사실상 '선덕여왕'을 미실의 드라마로 만들어 버렸었지요. 저의 개인적 견해로 '추노'는 명품 사극이긴 하지만 '선덕여왕'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동적인 화면 구성이나 액션 등을 생각해 본다면 물론 '추노' 쪽이 앞선 부분도 존재하지만, 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시청하는 인물 심리면에서는 뚜렷하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큰 주모(조미..
"너는 항상 네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바로 내가 지금 너를 죽이려는 이유다." - '추노' 공식 홈페이지, '황철웅' 인물 소개 첫 문장 '추노'에는 황철웅이라는 이름의 악역이 등장합니다. 출중한 연기력의 배우 이종혁이 서늘한 눈빛으로 열연하고 있지요. 그에게서 매력적인 악역을 보고 싶었는데, 저는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그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그에게서 풍기는 어떤 비감한 분위기... 아무리 애를 써도 1인자가 되지 못하는 살리에르의 슬픔이랄까, 그런 면에서 적잖은 공감과 매력을 느끼시는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고통이 그렇게까지 큰 것일까 하고 저도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송태하에게 특별히 원한을 가질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