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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짝귀, 그 사내가 사는 법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추노

'추노' 짝귀, 그 사내가 사는 법

빛무리~ 2010. 3. 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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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짝귀다. 내 손으로 주먹을 가르친 아우 대길이에게 한쪽 귀를 잘린 후, 사람들은 나를 짝귀라고 부른다. 조롱하는 소리인 줄 알지만 상관없다. 뭐 귀담아 들을 소리가 있는 세상이라고 귓바퀴를 두개씩이나 달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 우리네 바닥에서는 서로 놀려대며 투닥거리는 것이 원래 친하다는 표시다. 남들이 나를 짝귀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다. 이 험상궂은 사내를 무서워하지 않고 좋아한다는 얘기다. 어차피 맨손으로 태어나 맨손으로 떠나갈 인생인데, 이 정도면 만족스럽지 아니한가!

나를 짝귀로 만들어 놓은 아우 대길이를 나는 좋아한다. 놈은 진짜 사내다. 주먹질도 발길질도 늦게 배웠으면서, 저를 가르친 언니들을 모조리 때려 눕힐 때부터 예삿놈이 아닌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놈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의리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조선 팔도강산을 누비며 대길이만큼 의리있는 사내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만약 대길이보다 더 의리있는 사내가 있다면, 이 짝귀의 남은 귀 한쪽마저 베어가도 좋다.


내심 기다리고 있던 대길이가 산채로 찾아왔을 때, 반갑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사내들은 오랜만에 만났으면 우선 칼부림으로 인사부터 나눠야 하는 거다. 귀를 잘라 주겠다는 말은, 내가 대길이를 만나면 언제나 신나게 불러대는 노래와도 같은 거다. 그러면 대길이는 얼쑤, 장단을 맞추며 "왼쪽 귀를 자르실라우, 오른쪽 귀를 자르실라우?" 하고 물어 온다. 역시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이다. 대길이란 놈을 만나면 다 죽어가다가도 갑자기 살맛이 난다.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나서 얼싸안고 눈물콧물 흘리면서 펄펄 뛰는 꼴이라니 정말 눈 뜨고 못 봐주겠다. 아마도 죽은 줄 알고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러게 사람이 없어졌으면 얼른 이 짝귀를 찾아와야지, 어디서 맘고생만 하며 헤매다가 이제야 찾아왔단 말이냐? 바깥 세상에서 발 디딜 곳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이 짝귀의 세상으로 찾아오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내 품안으로 날아드는 새를 한 번도 내쫓은 적이 없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바람처럼 떠돌며 살던 나를 보며,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었다. 이 면상을 해갖고는 눈에 독기만 가득 품고 다녔으니 보는 사람마다 기겁을 하고 도망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물가에서 겁도 없이 나와 눈을 맞추며 배시시 웃어대는 계집애를 만났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은 가족이 내게 생겼다. 물 한 대접 떠놓고 맞절을 한 것뿐인데,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다. 햇빛은 왜 이리도 밝은 것이며, 봄꽃들은 왜 저리도 하염없이 방싯거리는 겐가? 하지만 천하에 고운 꽃이 아무리 많아도 내 마누라의 얼굴만은 못하였다.

마누라의 배가 점점 불러오자 나는 몸둘바를 몰랐다. 애비가 된다는 건 당최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저 한평생 길바닥에서 혼자 굴러먹고 살다 가겠거니 했는데, 나 같은 놈에게 자식이 생기다니! 나는 그 녀석을 하루빨리 보고 싶었다. 캄캄한 뱃속에 갇혀 있는 게 오죽 답답할까 싶어서 애가 달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꼬박 여덟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가 언제 나오느냐고 안달을 해대는 나를 보며, 마누라는 짜증내지도 않고 매일 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 그 어느 봄꽃보다 환하게 웃던 마누라가 이제는 나를 보며 웃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그토록 보고 싶던 내 새끼는 끝내 세상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제 어미의 손을 잡은 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피가 흥건한 방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마누라의 손을 잡은 채 며칠을 보냈다. 뭘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어린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부지, 아부지~~"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소리는 꼭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세상 빛도 못 보고 가버린 내 아이가 뭔가 나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저승길을 가다 말고 되돌아 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울고 있는 아이는 옆집 최서방의 일곱살 난 아들이었다. 최서방네 마누라는 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최서방 혼자 아이를 키웠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양반집 노비 한 명이 도망치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것이 발각되어, 그 집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온 몸의 살갖이 너덜너덜하고 정신마저 혼미한 그를, 어린 아들 혼자 있는 집에 내팽개쳐 놓고, 그 양반집 노비들은 휑하니 돌아가버렸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한 채 꺽꺽 앓던 최서방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나는 울부짖는 어린애를 끌어안았다. "네 아비만은 못하겠지만, 우리 한 번 같이 살아보자."


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사람을 모았다. 그러다가 천지호를 만났고, 숭례문 개백정이를 만났고, 대길이를 만났다. 죄다 성질은 더러워도 속정은 뜨끈뜨끈한 놈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의 돈이 모이자마자 애초의 생각대로 멀찌감치 떨어진 월악산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새 부모 잃고 떠돌던 아이들을 서너명이나 데리고 있던 나는 어지러운 한양을 떠나, 그애들에게 보다 아늑한 집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 후로 대길이는 추노꾼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어쩌는 건지, 툭하면 자기가 잡은 노비며 여종들을 내게로 보내곤 했다. 처음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내칠까도 했지만, 나를 믿고 보냈는데 내쳤다가 잡혀서 죽기라도 하면, 대길이는 그 성정에 목숨값을 나에게 물을 것이니, 죄없는 사람들을 죽였다는 죗값을 내 어찌 감당할 수 있냔 말이다.

그런데 여럿이 살아보니 좋은 일이 많았다. 우선 일할 사람이 많아지니 비록 척박한 산 속에 짓는 농사지만 나날이 수확도 늘어갔고, 저녁 무렵이면 남녀노소 모여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거리기도 했는데,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절반이나 허풍을 섞은 이야기를 지껄이다 보면 하룻밤이 짧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갈 곳 없는 처지였는데, 내가 받아주었기 때문에 나에게 감사하고 있었으며, 내가 아무리 허풍을 떨어도 웃고 즐거워했다.


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얼굴도 보지 못한 내 아이 생각이 저절로 난다. 언젠가 대길이가 보냈다면서, 제 엄마 손을 꼭 잡고 찾아왔던 은실이... 어쩌면 마누라 뱃속에 들었던 내 아이도 저런 계집애였을지 모른다.

비쩍 마르고 새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던 것이, 이제는 제법 뽀얗게 살도 올라서 머리꼬랑지 휘날리고 뛰어다니며, 툭하면 깔깔대고 웃는 꼴을 보면 언제나 흐뭇하다. 아직도 아기 종달새처럼 조그마한 저 아이를 환갑 진갑도 다 지난 늙다리 양반이 첩으로 삼으려 했다니! 대길이는 저 아이를 구하면서 단지 급소를 짚어 기절만 시켰다고 했으나, 만약 내 손에 걸렸다면 그 늙은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게다.

오랜만에 만난 대길이는 반가웠지만, 그 뒤를 따라 온 양반 차림의 부부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대길이가 데려온 자들이니 내칠 수야 없지. 내깐에는 좀 친해보려고 찾아가 말을 걸었으나, 뻣뻣한 사내놈은 한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속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이토록 꽉 막혔는가? 그래도 대길이를 봐서 일단 덮어두고, 사실은 아까부터 눈이 끌리던 어린애를 달라고 하여 품에 안아 보았다.


이름이 태원이라고? 고 놈 자알 생겼다. 보통 어린 아기들은 내 험상궂은 얼굴을 처음 보면 악을 쓰고 울어대는 게 보통인데, 요 녀석은 방실거리며 웃기까지 한다. 가슴이 짜릿짜릿하고 녹아내리는 것 같다. 어쩌면 무정하게 떠나버린 내 아이도 이런 사내녀석이었을지 모른다.
내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이도 이렇게 나를 보며 웃어 주었겠지? 차마 품에서 내려놓기가 싫었다. 데리고 나가서 한참을 더 놀고 싶었지만, 아이 어미가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어 주었다. 아이를 어미에게서 억지로 떼어놓는 것은 못할 짓이니까 하면 안 되는 거다.

나는 커다란 꿈을 꾸지 않는다. 태생이 천하고 그릇이 작게 태어나서인지,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다. 비록 남들은 우리를 도둑이며 화적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봇짐을 털지 않고, 좀 넉넉한 사람들만 골라 그들의 주머니에서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올 뿐이다. 걸핏하면 우리의 피를 빨아먹으려는 양반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이 곳에서, 귀여운 아이들이 차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그렇게 하루하루 조용히 살다 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그렇게 살다가 저 세상에 가서 내 아이를 만나면, "아부지, 잘하셨어요" 하고 말해주지 않을까? 그러면 옆에 있던 마누라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의 멀뚱한 표정을 바라보며 꽃처럼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거친 사내 짝귀가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이다.

* 독백 형식의 이 리뷰는 많은 부분이 저의 상상에 의해 재창조된, 개인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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