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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초복이의 편지 - 업복이에게 [추노 편지5] 본문

종영 드라마 리뷰 /추노

'추노' 초복이의 편지 - 업복이에게 [추노 편지5]

빛무리~ 2010.03.17 13:39


아저씨, 업복 아저씨,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저씨, 혹시 날 좋아하나요?


아저씨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잠잘 때 꿈을 꾸어 본 적이 없는데, 참 이상하죠. 난 요즘 잠만 자면 꿈을 꾸어요. 그리고 그 꿈에는 항상 아저씨가 나와요. 그 못생긴 얼굴을 해갖고는 날 보며 헤벌쭉 웃는, 그런 아저씨가 요즘 매일 내 꿈에 나온단 말이에요.

아저씨는 나에게, 좋은 세상이 오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지만, 나에겐 꿈이 없었지요. 눈 뜨면 오늘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견뎌 나가야 할 또 하루의 삶이 펼쳐져 있었고, 밤이 되면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행복해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곤 했는걸요.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겠어요? 이런 나에게 무슨 꿈이 있었겠어요?

그래서 난 대답했지요.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는 세상"이라고 말이에요. 진심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멋대가리 없는 말이었네요. 사실 멋없다는 이런 생각도 최근에나 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아저씨를 알게 되기 전에는 이런 생각도 한 적 없었지요. 그냥... 죽을 수는 없으니까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어요. 산다고 죽는 것보다 나을 것도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죽는 건 무섭더라구요. 웃기죠? 길가에 구르는 개똥같이 살아온 나 같은 계집애도 무서운 게 있다니 말이에요.

그래도, 나도 몰랐는데, 나도 여자더라구요.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뭐... 그러잖아도 드센 제 팔자를 더욱 드세게 해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남자들이 가진 것, 그거 하나 못 갖고 태어난 죄로, 이리저리 짓밟히는 것도 모자라서 노리갯감이나 되면서 그렇게 한평생 살아야만 하는 얄궂은 팔자인가 했는데... 아저씨, 참 이상하죠? 아저씨를 알게 된 후로는 내가 여자라는 게 좋아졌어요. 한 번도 여자로 태어난 팔자를 고맙게 생각한 적 없는데, 아저씨 때문에 내 팔자가 다 예뻐져요.


난 기억도 안 나지만, 울 아부지는 한겨울에 얼음 가지러 강에 갔다가 빠져 죽었대요. 그리고 울 엄마는 다른 데로 시집을 갔는데, 나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면서 막 울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요. 엄마는 시집을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주인나리가 보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던 거예요. 나를 끌어안고 한없이 울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상하죠? 죽고 싶다가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곤 했어요. 나에게도, 이런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어요.

노비만 아니었다면, 울 아부지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고, 울 엄마도 나를 떼어놓고 다른데로 시집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내 뺨에 이 원수같은 문신이 새겨지지도 않았을테고 말이에요. 어린 나는 그냥,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도망쳤을 뿐인데, 하루 하루 숨 쉬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잠시라도 편하게 숨 좀 쉬려고 도망쳤을 뿐인데, 그 잘난 양반들은 나를 잡아다가 개패듯이 때린 것도 모자라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네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일찌감치 어느 늙은 양반님네의 첩이 되어 팔려갔겠죠. 그보다는 차라리 이 꼴을 하고 평생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남정네와의 낯뜨거운 연정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이런 얼굴을 한 계집을 좋아할 남정네도 없거니와, 나도 남자는 별로였어요. 자기네들이 잘난 줄 알고 어깨에 힘은 잔뜩 들어가 있지만, 알고 보면 저보다 더 겁쟁이들이더라구요.

그런데 업복 아저씨, 참 이상하죠? 아저씨를 알게 된 후로는 자꾸만 신경이 쓰이네요.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던 제 얼굴의 문신이 원망스러워져요. 내 잘못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원래의 내 모습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아무리 애써 생각하려 해도, 아저씨 앞에만 서면 너무 속상해져요. 일부러 세수도 안 하고 꾀죄죄한 몰골로 아저씨 앞에 나서곤 하지만, 오히려 뽀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이 흉한 문신이 더욱 두드러질까봐 그러는 줄을 아저씨는 몰랐죠?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어차피 우리 인생이야 눈 감았다 뜨면 살아있을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삶들이잖아요?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다리 아프다고만 하면 두말없이 그 널찍한 등을 들이대고 나를 업어주는 아저씨... 그 마음 누가 모른대요? 숨기려고 해도 벌써 다 들켰어요.

주인나리가 우리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를 누군지도 모를 사내에게 시집보내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냥 평생 이렇게 아저씨 옆에 있을래요. 얼굴이 이 모양이니 누구에게 시집보내려 해도 마땅치 않겠죠?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아저씨에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나는 짐이 될 생각 없어요. 그냥 지금처럼 아저씨 곁에만 있으면 돼요. 알잖아요? 나 씩씩한 거... 나 혼자서도 뭐든지 잘할 수 있지만, 너무 힘들 때... 아주 조금씩만 기댈게요. 아저씨... 나를 좋아하는 거 맞지요? 그러니까 나를 혼자 두지만 말아요. 그건 해줄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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