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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
‘육룡이 나르샤’ 36회에서 드디어 선죽교가 정몽주(김의성)의 피로 물들었다. 어떻게 될 줄을 모두가 알면서도 손꼽아 기다려 온 ‘피의 선죽교’ 그 명장면이 드디어 방송된 것이다. 이방원(유아인)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구태의연한 시조 형식이 아닌, 새로운 해석을 곁들여 대사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김의성과 유아인의 명연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명장면을 감상하면서도 나의 가슴이 울리지는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표현되는 ‘하여가’에 김영현 작가는 ‘백성’의 존재를 대입시켰다. 이방원의 원래 시조가 “우리끼리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면 되지, 나라가 바뀌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 ..
'대장금'과 '서동요' 이후 김영현 작가의 사극에 매료된 나는 '선덕여왕'과 '뿌리깊은 나무'를 시청하며 그녀의 필력을 극도로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요즘 시대에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고, 작품을 감상하다가 실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외국에 수출될 경우는 좀 더 오해의 소지가 많겠으나, 방영 전에 자막으로 '이 작품은 허구와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물로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면 큰 문제는 되지 ..
지금껏 오혜원(김희애)의 삶에 순수란 없었다. 오직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진대,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는지, 음대 재학 시절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재원이었던 오혜원은 건초염 악화로 꿈을 접으면서부터 예고 동창 서영우(김혜은)에게 달라붙어 그 집안의 시녀가 되었다. 서한그룹 회장인 아버지 그늘에서 보호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살아 온 서영우는 걸핏하면 오혜원의 뺨까지 때리면서 모욕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길 만큼 혜원의 가슴은 무디어진지 오래다. 상처받기 쉬웠던 예술가의 여린 감성은 어느 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혜원..
열심히 챙겨보던 드라마는 아니지만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종영을 앞둔 시점에서 생각하니 크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장희빈의 이야기는 이제껏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즐겨 차용되었지만,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구태의연하고 전형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죠. 그나마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야심찬 변화의 시도가 좀 있기도 했습니다. 김혜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7대 장희빈(2002년)의 경우, 초반에는 전형적인 악녀가 아니라 진취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문제는 시청률 부진이었습니다. 어차피 뻔한 내용인 줄을 다 알면서 또 '장희빈 드라마'를 선택한 시청자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악녀 장희빈'과 '선녀(善女) 인현왕후'의 첨예한 대결을 지켜보다가, 장희빈이 천벌을 받고 인..
'성균관 스캔들'에서 서효림이 연기하고 있는 하효은 낭자는 매우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병조판서 하우규(이재용)의 딸이며 성균관 장의 하인수(전태수)의 여동생이지요. 아버지도 오라비도 진지한 악역을 수행중인데 그녀만 등장하면 삽시간에 이 사극은 오갈 데 없는 시트콤이 되고 맙니다. 처음 등장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자랑하던 효은은, 엄연한 사대부가의 규수가 자기 방에서 속옷 차림으로 외간남자인 이선준(박유천)과 맞닥뜨리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노골적인 유혹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과연 성균관의 신입을 골탕먹이겠답시고 "자기 여동생과 하룻밤을 지내고 오라"는 미션을 던져주는 그 오라비의 누이답게 가볍고 천박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선준은 나중에 미션 수행 실패의 책임을 묻는 선배에게 "부..
'성균관 스캔들' 4회에서는 몇 가지의 주목할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고독한 원칙주의자 이선준(박유천)과 생계형 현실주의자 김윤희(박민영)는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차츰 '내 편'으로 가까워졌고, 주요인물이면서도 3회까지 더벅머리 휘날리며 가끔씩 얼굴 한 번씩 비춰 주시는 것이 전부였던 걸호 문재신(유아인)이 드디어 공식적으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문재신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본다면, 저잣거리에서 부랑아로 살던 그를 볼 때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유아인의 곱상한 외모가 마음에 들었었습니다. 그 언밸런스함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성균관에 들어와 단정하게 상투를 틀고 의관을 갖추니 이젠 오갈 데 없는 꽃미남이라, 아무리 버럭질을 하고 난동을 부려도 그 느낌이 별로 살지 않더군요. 선이 굵고 ..
이선준 역을 맡은 박유천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표정이 다양하지 못한 점은 미숙하다 하겠으나, 발성이나 억양 등 대사 연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더군요.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별 것 아닌 말을 하는데도 괜히 몇 차례나 감동을 받았다는..;; 하여튼 경력이 일천한 연기자들은 대부분 표정보다 대사에서 헛점을 많이 드러내는데, 박유천은 연기에 괜찮은 소질을 갖춘 듯하여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은... 박진감이 넘치던 1회에 비해 확연히 지루해진 2회를 보자 조금씩 난감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가더군요. 너무 성급한 우려인지도 모르지만, 벌써부터 힘이 딸리기 시작한 것인가 싶기도 했구요. 아무래도 '신데렐라 언니'의 제작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우울하던 용두사미의 기억을..
'성균관 스캔들'은 고요한 밤중에 갑작스런 우뢰 소리처럼, 내 마음을 강렬하게 두드렸네. 이곳에는 치렁치렁한 도포자락에 감싸였을 망정 어린 나무처럼 싱싱한 젊음들이 가득한데, 마음껏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현실의 벽은 지금보다 더욱 높았다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젊음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무기가 아니던가! 아직 연륜이 일천하기에 가진 힘은 없지만, 이들은 당차게 기성세대와 맞서며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네. 1. 김윤희 (박민영) 몰락한 양반가의 장녀이며 당돌한 소녀가장이로세. 아비 김승헌이 노론의 모함을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명횡사한 후, 가냘픈 몸으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이 처자가 홀로 부양해 왔네. 아무리 가난해도 반가의 규수로서 그 차림 그대로 돈을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