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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 사랑에 살다' 주인공은 숙종 이순이어야 했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주인공은 숙종 이순이어야 했다

빛무리~ 2013. 6. 2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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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챙겨보던 드라마는 아니지만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종영을 앞둔 시점에서 생각하니 크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장희빈의 이야기는 이제껏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즐겨 차용되었지만,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구태의연하고 전형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죠. 그나마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야심찬 변화의 시도가 좀 있기도 했습니다. 김혜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7대 장희빈(2002년)의 경우, 초반에는 전형적인 악녀가 아니라 진취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문제는 시청률 부진이었습니다. 어차피 뻔한 내용인 줄을 다 알면서 또 '장희빈 드라마'를 선택한 시청자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악녀 장희빈'과 '선녀(善女) 인현왕후'의 첨예한 대결을 지켜보다가, 장희빈이 천벌을 받고 인현왕후가 승리하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통해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아요. 장희빈 스토리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것은 전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흡입력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는, 우습게도 장희빈이 심하게 욕을 먹을수록 크게 성공한다는 불변의 법칙을 지금까지 이어 왔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캐릭터에 변화를 주고 싶어도, 장희빈을 미화시켜서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웠지요. 초반에 변화를 모색하던 김혜수의 7대 장희빈도 결국은 시청률에 무릎을 꿇고 전형적인 악녀 캐릭터로 회귀했더랍니다. 8대 장희빈(2010년) 이소연의 경우는 포악스런 악녀가 아니라 차분하고 지적인 여인으로 변신하는데 나름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주인공이 아니었지요. 당시 주인공은 '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숙빈 최씨(한효주)였고, 언제나 주인공에게 절대적 비중을 하사하는 이병훈 사극의 특성상, 장희빈 캐릭터는 전혀 주목받지 못할 만큼 비중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13년, 최고의 지성과 미모를 자랑하는 김태희가 9대 장희빈으로 돌아왔군요.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제목이 노골적으로 암시하듯, 이번에도 제작진은 변화를 꾀했습니다. 권력욕에 불타는 악녀가 아니라 간절한 사랑에 목숨 거는 순수한 여인으로 말이죠.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장옥정의 착한 모습만 비추어지던 초반에는 시청률이 완전히 바닥을 치며 김태희에게 전대미문의 굴욕을 안겨 주더니, 장옥정이 궁중에 들어와 인현왕후(홍수현)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맞대결을 펼치기 시작하자 눈에 띄게 시청률이 반등했거든요. 비록 명성대비(김선경)가 더 지독한 악역을 담당하고는 있었지만, 현숙하고 소극적인 태도의 인현왕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장희빈은 악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작진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인현왕후의 캐릭터를 악역으로 둔갑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대비가 죽은 이후에는 숙빈 최씨(한승연)가 장희빈을 상대하는 악역(?)으로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초점을 장희빈에게 맞추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변화를 시도해 봤자 뚜렷한 한계가 있고, 그 폭이 지나치게 좁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새삼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에요. 아, 그리고 시청자가 원하는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전형적인 악녀로 돌아가 한껏 포악을 떠는 편이 낫다는 불변의 법칙을 또 한 차례 확인시켜 주었죠. 그래야만 주인공의 존재감이 제대로 살아나고 작품의 주제를 비롯한 모든 내용이 선명해지니까요. 간단히 말하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장희빈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주인공이었습니다. 주인공이 그러니 따라서 인현왕후도, 숙빈 최씨도 애매모호한 캐릭터가 되고 말았죠. 그 어느 쪽에도 완벽한 선이나 악의 옷을 입힐 수 없는... 이러한 인물 묘사가 오히려 현실적이기는 하겠지만, 드라마에서는 결코 유리하지 못합니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최대한 뚜렷한 개성을 어필해야만 몰입도를 높일 수 있거든요.

 

 

여기서 땅을 치도록 아까운 것은, 모처럼 대단히 개성있고 매력적인 왕으로 재탄생했던 숙종 이순(유아인)의 캐릭터입니다. 이제껏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서 숙종은 그저 우유부단하고 줏대 없이 여자들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왕으로 표현되었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숙종은 결코 유약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줏대 없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볼 때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지금까지 그 시대를 다루었던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숙종을 가장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표현한 작품이었어요. 따라서 처음부터 작품의 초점을 장희빈이 아니라 숙종으로 잡았다면, 내용의 완성도라든가 고증의 퀄리티 등 모든 면에서 아낌없이 찬사를 받는 명작으로 탄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적 특징은 '당쟁(黨爭)'과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는 단어들로 축약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도 보람도 없이 수백 년간이나 독하고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끝내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간 당쟁의 경우는 그저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 한심스런 작태이나, 군약신강의 경우는 뭐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겠지요. 조선 중기 수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는 동안 조정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전쟁이 휩쓸고 간 땅은 메말랐으며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대외적 상황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던 대신들이라고 잘한 것은 없겠으나, 어쨌든 (그 시절)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니 국가적 불행의 책임도 고스란히 임금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특히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의 일개 장수 앞에 조선의 임금(인조)이 무릎을 꿇고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치욕'까지 겪었습니다. 신하들 눈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 후, 더 이상 무슨 체통과 권위가 남아 있겠습니까?

 

 

그런데 숙종은 조선 후기를 지배하던 '군약신강' 구도에서 벗어나 절대군주 통치 체제를 확립했던 왕으로서, 그야말로 두드러진 예외였습니다.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무려 46년이나 옥좌에 있는 동안, 숙종은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토지 측량법을 개선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군역 및 조세 체제를 확립했으며, 북한산성을 개축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짓는 등, 정치 경제와 외교적 분야에서 모두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겻습니다. 모든 가호에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는 양반들의 거센 반대로 결국 좌절되었지만, 그가 이루어낸 업적만 보더라도 신하들의 눈치나 보는 유약한 임금으로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죠.

 

또한 숙종의 치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세 차례에 걸친 환국(換局)이었습니다. 환국이란,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붕당 정치 속에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한 숙종이 일방적으로 지배 세력을 교체해 버렸던 사건인데, 첫번째 환국을 단행했을 때 숙종의 나이는 고작 19세의 약관에 불과했으니, 그 인품이 얼마나 담대하고 강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본질적으로 정책의 대립보다는 궁중의 다툼에서 기인한 측면이 컸고, 그 방식이 지나치게 돌발적이었으며, 그 결과 또한 파괴적이고 소모적이었다는 측면에서, 숙종 시절의 환국은 부정적 성격이 더 크다고 지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숙종이 매우 강력한 군주였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겠죠.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20대 남자 배우들 중 독보적인 연기력과 카리스마로 주목받는 유아인을 내세워, 누구보다 강인하고 영민한 군주 숙종을 매우 실감나게 형상화시켰습니다. 세 차례의 환국을 일으킬 당시 숙종의 나이가 20~30대의 청춘이었으니, 현재 28세의 유아인은 연령대로도 더할 수 없이 최적화된 캐스팅이었네요.

 

만약 이 드라마의 타이틀롤이 '장옥정'이 아니라 '이순'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희빈 장씨에게 좀 특별한 애정을 쏟았던 듯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숙종에게 있어 여인과의 사랑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 때 사랑했던 여인이라도 권력의 흐름을 주도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여 버릴 수 있는 비정한 남자였죠. 그런 숙종이 주인공이었다면, 무시무시한 당파 싸움과 비정한 임금의 사랑 틈바구니에서 속절없이 애만 태우다 스러져간 여인들의 고통은 비극적 분위기의 배경으로 사용되었을 테고,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표현이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기껏 숙종 이순의 캐릭터를 사실(史實)에 가깝게 잡아 놓고서도 그것을 타이틀로 삼지 않고 생뚱맞게 '장옥정의 사랑'을 표면에 내세웠으니, 이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명작이 될 수 있었던 드라마는 그저 오글거리는 사랑 타령만 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망작으로 전락하고 말았군요. 이제 다 끝난 마당에 이런 소리를 해봤자 소용 없겠지만, 정말 아쉽고도 서운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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