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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이재하(이승기)와 김항아(하지원)의 약혼이 결정되고 김항아가 대한민국 왕실로 옮겨 와 살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두 사람의 결합은 매우 삭막한 정략결혼에 가까운 느낌이었죠. 벌써 이재하의 매력에 빠져서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김항아는 기꺼이 정든 고향을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이 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쏟아지는 것은 온통 차가운 시선들뿐, 아무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국왕이신 맏아드님의 결정을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역시 북한 여자를 둘째며느리로 맞이하기가 썩 탐탁지 않았던 대비의 까칠함은 물론이거니와, 약혼자가 될 이재하조차 특유의 깐족거림으로 놀려대기나 할 뿐 아직은 마음이 무르익지 않아서 항아의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항아는 강한 여자였고 이 곳에 올 때부..
김봉구(존 메이어, 윤제문)의 검은 손에 의해 국왕 이재강 내외(이성민, 이연경)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보며, 따라서 급작스레 왕위를 계승하게 된 이재하(이승기)가 물러나겠다는 비서실장 은규태(이순재)를 만류해서 자기 곁에 두는 모습을 보며, 그런 은규태의 약점을 잡은 김봉구가 본격적으로 그를 협박해서 이용하기 시작하는 사태를 지켜보며, 저는 줄곧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은규태의 그 어이없는 실수는... 과연 실수였을까? 노련한 은규태가 순간적으로 무엇을 착각하거나 실수할만한 상황이 있었던가를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제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은규태는 대한민국 왕실에 매년 큰 액수의 기부를 하고 있는 영국인 부호 다니엘 크레이그를 접견하여..
이제 70대에 접어든 원로 작가 박정란이 집필한 드라마 중 저의 머릿속에 아직도 강렬히 남아있는 작품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울 밑에 선 봉선화'입니다. 너무 오래 전에 보았던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시대의 아픔 속에 인간의 섬세한 감정이 진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수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주인공 정옥(김미숙)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두 여동생 정애(권기선)과 정임(전인화)의 삶 또한 극도의 애련함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긴 호흡을 지닌 일일드라마였음에도 시놉과 대본이 매우 탄탄하여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고, 인물 하나 하나의 스토리가 굉장히 역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원로 PD 허환 선생님의 드라마 작법 강의를 들으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주 잠깐 박정란 작..
저만의 독특한 느낌인지도 모르지만 '하이킥3'의 박지선을 보면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노홍렬(이홍렬)이 떠오릅니다. '웬만해선...'이 방송되던 2001년 무렵, 이홍렬은 최고의 개그맨이자 MC로서 한창 잘 나가고 있었지요. 그런 그가 시트콤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그가 가장 코믹한 캐릭터를 맡아서 큰 웃음을 줄 거라고 누구나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이홍렬이 맡은 캐릭터는 가장 웃음기가 없고 진지한 역할이었습니다. 노구(신구)의 둘째아들 노홍렬은 어린 딸 민정(김민정)을 남기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십여년 동안이나 재혼하지 않고 혼자서 딸을 키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옆집에 이사 온 배종옥을 보고 한 눈에 반해서 길고도 간절한 짝사랑을 시작하게 되지요. 자그마한 체격에..
누구인들 쉬운 길로 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누구인들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갈채 치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쉬운 선택을 한 사람들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나 자신부터가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좋은 작품과 인기 많은 작품이 꼭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명작 예술품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작품이 같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외한도 다 아는 원칙을 그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베테랑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다수에게 칭찬받고 시청률을 높이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김병욱 PD가 모를 리는 없습니다. '하이킥3'는 유난히 초반부터 대중의 관심이 높았고, 또 그만큼 질책도 심한 작품입니다. 김병욱은 언제나 그렇듯 자기 고집대..
'하이킥3 - 짧은 다리의 역습'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얼마나 더 독해지려고 초반부터 이렇게 심한 설정들이 등장하는지, 나중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설 지경입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김병욱 PD의 칼날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것 같습니다. 사실 '지붕뚫고 하이킥'도 처음부터 만만치 않게 독한 작품이었지요. 어린 자매는 어느 날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 모질게 내던져졌고, 아홉살배기 어린 신애는 전쟁고아처럼 비참한 몰골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걸어다녔습니다. 언니 세경의 손을 놓쳐서 잠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계속 울면서도 거리에서 눈에 띄는 음식만 있으면 몽땅 주워먹고 다니던 신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집 대문 앞에 배달되어 놓여 있던 1000ml 짜리 우유..
고영욱이 언제부턴가 폭로의 아이콘이 된 것은 하루이틀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오래 방송을 쉬다가 복귀하면서 고영욱이 선택한 작전(?)이 바로 동료 연예인들의 과거사를 폭로하는 거였으니까요. 하긴 연예인으로서 어떻게든 대중의 시선을 끌기는 해야겠는데, 노래도 랩도 비주얼도 연기도, 그 무엇 하나 특출한 면이 없고 평범한 수준이니 궁여지책으로 그랬겠지요. 하지만 너무 대놓고, 이를 악물고 작정한 게 너무 티가 날 정도로 독하게 폭로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참 난감했습니다. 폭로의 대상이 된 연예인들이 한창 잘나가는 사람들이면 좀 나았을 텐데, 거의 대부분이 활동을 접고 있는 과거의 스타였기에 더욱 민망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방송 활동을 재개하려고 발버둥치는 고영욱도 딱하고, 꼼짝없이 집에 앉아서 그 폭로의 ..
저는 원래 방송사를 불문하고 일일연속극을 거의 시청하지 않습니다. 식상한 소재와 자극적인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 전개 등은 한국 드라마가 거의 대부분 지니고 있는 고질병이지만, 특히 일일연속극의 경우는 그 함정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선 일주일에 무려 5회씩, 거의 30분에 달하는 분량을 채우려면 작가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알찬 내용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보통 16부 정도면 끝나는 미니시리즈와 달리 일일연속극은 100부작이 넘어가는 엄청난 분량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실제로 '웃어라 동해야'는 무려 159부로 마무리되었으며, 현재 방영중인 '불굴의 며느리'는 120부작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죠. 하나의 드라마에서 ..
여주인공 세령(문채원)은 이제 슬슬 민폐 캐릭터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승유(박시후)의 형수와 조카딸 아강이는 노비의 신세가 되어 원수의 일당 중 한 명인 온녕군(윤승원)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데, 세령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가엾은 모녀를 구해 승법사로 피신시킵니다. 역적의 수괴로 몰린 김종서(이순재)의 가족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다른 사람이라면 죽을 위기에 처할 것이나, 수양대군(김영철)의 딸인 세령으로서는 자신의 안위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요. 하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활약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령은 더 이상 민폐 캐릭터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김승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죽겠다는 협박(?)으로 아비를 설득하려던 모습도..
원래 사극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최근 들어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약한 남자'도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가 있지만 사극에서는 절대 '약한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내라도 상관없고, 심산유곡에 은거하는 선비라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만 강한 남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스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갈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은 채 모든 비극의 소용돌이를 홈빡 뒤집어쓰고 만다면, 그 무력한 모습으로는 어떤 공감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현재 방송 중인 '계백'과 '공주의 남자'에서는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초반이라서 그럴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