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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의 입맞춤' 박정란 작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본문

드라마를 보다

'천 번의 입맞춤' 박정란 작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빛무리~ 2011. 11. 2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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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0대에 접어든 원로 작가 박정란이 집필한 드라마 중 저의 머릿속에 아직도 강렬히 남아있는 작품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울 밑에 선 봉선화'입니다. 너무 오래 전에 보았던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시대의 아픔 속에 인간의 섬세한 감정이 진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수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주인공 정옥(김미숙)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두 여동생 정애(권기선)과 정임(전인화)의 삶 또한 극도의 애련함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긴 호흡을 지닌 일일드라마였음에도 시놉과 대본이 매우 탄탄하여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고, 인물 하나 하나의 스토리가 굉장히 역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원로 PD 허환 선생님의 드라마 작법 강의를 들으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주 잠깐 박정란 작가에 작품 특징에 대한 언급을 하셨던 것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박정란씨는 한국 드라마 작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악역이 없는 드라마'를 쓰시는 분"이라고 허환 선생님이 말씀하셨었죠. 생각해 보면 박정란의 작품은 언제나 따뜻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도 물론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각양각색의 갈등과 어려움이 존재했지만, 그 누구도 "저 놈은 진짜 나쁜 놈이다!" 라고 성토할 수 있을만한 악역은 없었습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에서도 정임이를 몹시 구박하던 시어머니가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듣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문화로 비추어 볼 때는 충분히 존재했을 법한,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시어머니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였습니다. 특별한 악역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죠.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사랑했으나 그 누구의 삶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시대의 이야기였습니다.

박정란 작가는 그 이후에도 활발한 집필 활동을 계속하며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도 그 직위에 계신지 여부는 잘 모르겠네요) 2000년대에 접어든 후에도 '노란 손수건' 이라든가 '행복한 여자' 등의 작품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고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면서, 시들지 않은 노익장의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선호하는 취향의 드라마와는 좀 거리가 먼 작품들이라 꾸준히 시청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래도 '울 밑에 선 봉선화'의 좋은 기억과 더불어 '악역이 없는 따뜻한 드라마'를 쓰시는 좋은 작가분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박정란 작가가 집필하는 주말연속극 '천 번의 입맞춤'을 보면 (아주 가끔씩 띄엄띄엄 보긴 했지만) 그야말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 자체가 너무 말도 안 되게 꼬여 있고, 게다가 유지선(차화연)의 캐릭터는 세상에 그런 인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지는 기이한 인간형입니다. 이 드라마의 집필 의도는 "연하남과의 사랑을 통해 상처 받은 이혼녀(싱글맘)들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거였다는데, 현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여주인공 우주영(서영희)의 삶에 있어 연하남 장우빈(지현우)과의 사랑은 위로가 아니라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도저히 바로잡을래야 바로잡을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예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영과 우주미(김소은) 자매는 할머니(반효정)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습니다. 할머니가 어머니의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떠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외도에 의한 가출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뿐, 자매는 더 이상 물어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자매가 성장한 후, 언니 우주영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수차례에 걸쳐 거듭된 남편의 외도와 뻔뻔함으로 인해 결국 애 딸린 이혼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샤방샤방한 연하남 장우빈을 만나 그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고, 자신의 처지 때문에 한동안 망설이던 우주영도 그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20대 초반의 동생 우주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상대는 나이차가 좀 많이 나긴 해도 허우대 멀쩡하고 자상하고 돈 많은 노총각 장우진(류진)입니다. 이쪽은 언뜻 보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커플이네요.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언니 커플보다 먼저 결혼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장우진의 계모는 바로 우주미의 생모인 유지선이었습니다. 어려서 자매를 두고 집을 나갔던 엄마는 재벌회장 장병두(이순재)에게 시집가서 그 전처가 남긴 아들 장우진을 키웠던 것이죠. 여기까지는 임성한 작가의 '하늘이시여'와 유사한 내용입니다.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는 봐줄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 드라마의 내용은 한없이 비비 꼬여 있습니다. 언니 우주영과 사랑에 빠진 장우빈은 바로 장우진의 사촌동생입니다. 이 커플이 결혼한다고 가정하면 친자매는 사촌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며, 막장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언니가 손아래 동생이 손위로 어김없이 순서도 뒤바뀌어 있습니다. 유지선은 자신의 두 딸을 각각 며느리와 조카며느리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며, 딸들은 자기 친엄마를 시어머니와 시숙모로 모시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참기 힘든 설정이지만, 뭐 그래요. 요즘 드라마들이 다 그렇고 그런 거니까요. 여기까지도 꾹 참고 봐준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설정이 드러났습니다. 장병두 회장은 이미 연로하고 반신불수 상태인지라 회사 일은 거의 다 그의 동생 장병식(김창완)이 대신하고 있지요. 민애자(김창숙)는 장병식의 아내이며, 유지선의 손아랫동서이며, 장우빈의 어머니이며, 앞으로 우주영의 시어머니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민애자는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손윗동서 유지선을 미워하며 사사건건 비웃고 태클을 걸었습니다. 로열패밀리의 자부심을 지닌 민애자로서, 간병인 출신으로 시아주버니를 유혹하여 재벌가 마님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유지선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라고 이제껏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유지선은 젊었을 때 남편의 제자와 바람이 났었습니다. 주영과 주미의 아버지가 대학교수였다니, 그의 제자라면 아마도 대학생 청년이었겠군요. 그 사랑은 치명적인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누구에게도 용납될 수 없었던 사랑의 결과는 그지없이 참혹했습니다. 대략 상황을 유추해 본다면, 유지선은 분노한 시어머니에 의해 두 딸을 남겨둔 채 집에서 쫓겨났고, 제자와 바람난 아내 때문에 충격받은 남편은 병을 얻어 일찍 죽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유지선은 그 젊은 청년과의 사랑을 버리고 재벌회장 장병두를 만나 재가를 했습니다. 버림받은 청년은 사랑을 잃은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홀로 외국에 나가 쓸쓸하게 삶다가,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민애자의 친남동생이었습니다. 민애자가 유지선을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는 자기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민애자는 바로 그 유지선의 딸 우주영을 며느리로 맞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가장 황당한 것은 유지선의 캐릭터가 마치 악역이 아닌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저 기구한 운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죄를 지으며 살아왔을 뿐 기본적 심성은 선량한 사람처럼 그려지고 있으며, 그녀의 차분한 언행에서는 기품이 넘치기까지 합니다. 다혈질의 민애자와 함께 있으면 오히려 유지선이 훨씬 더 고상한 인품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박정란 작가는 유지선의 캐릭터를 "젊었을 때 잠깐의 사랑으로 쫓겨나듯 이혼하고 평생 속죄하듯 살아가는 여자" 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제 머리로는 아무리 거듭 생각해도 유지선처럼 추악한 악역은 없습니다. 그런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면 안된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녀는 대학교수의 아내이며 두 딸의 어머니로서 남편의 젊은 제자와 외도를 했고, 집을 나온 후에는 그 젊은이를 버리고 재벌가의 늙은 회장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녀를 사랑하던 남편과 젊은 애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핏덩이일 때 버리고 나왔던 둘째딸이 자신의 의붓아들과 사랑에 빠지자, 유지선은 모든 사실을 숨긴 채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큰딸이 시조카와 사랑에 빠졌군요. 유지선은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사랑도 허락해 주고 싶은데,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알고 있는 동서 민애자의 존재가 걸림돌입니다. 유지선이 주영과 주미 자매의 생모라는 사실을 민애자가 알게 되는 날, 온 집안에 불어닥칠 풍파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유지선, 그녀에게 있습니다.

원래 작가의 의도대로 우주영은 "남편의 배신으로 인한 이혼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과 사랑에 성공하는"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말대로라면 주영과 우빈은 결혼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우주영은 한 때 자기 엄마의 애인이었다가 그 사랑 때문에 죽은 남자의 누나를 시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 그 남자가 살아있었다면 시외숙이 되었겠죠. 도대체 이게 뭡니까? 그런 추악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어떻게 일과 사랑에 성공하는 인생역전입니까?

이 드라마가 방송되기 시작할 무렵 박정란 작가는 "시련, 고난, 절망을 지나 희망을 향해 스토리가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진실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싶다. 시청자들에게 스토리와 주제가 감동적으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말했다는군요. 하지만 이 추악한 스토리에서는 그 어떤 희망도 감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남녀 주인공인 우주영과 장우빈의 사랑은 차라리 맺어지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들이 희생해야만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무슨 짐승들도 아니고, 사람이 그런 관계로 얽혀서 살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상상만 해도 너무나 끔찍합니다.

악역이 없는 따뜻한 드라마를 쓰던 박정란... '울 밑에 선 봉선화'와 같은 명작을 남겼던 박정란 작가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막장이 판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던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충격이 더욱 커서, 실망했다는 말조차도 하기가 힘들군요. 박정란과 같은 노작가마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지게 만드는, 이 어두운 시대가 통한스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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