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공남' 악역 신면, 주인공을 뛰어넘는 존재감 본문
원래 사극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최근 들어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약한 남자'도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가 있지만 사극에서는 절대 '약한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내라도 상관없고, 심산유곡에 은거하는 선비라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만 강한 남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스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갈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은 채 모든 비극의 소용돌이를 홈빡 뒤집어쓰고 만다면, 그 무력한 모습으로는 어떤 공감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번번이 가장 한심해 보이는 것은 '공남'의 히어로 김승유(박시후)입니다. 그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장가만 들지 않았을 뿐 이미 조정에서 꽤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을 만큼 어엿한 성인이건만, 어째서 그렇게 눈치가 없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어두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공주를 희롱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수양대군(김영철)과 신숙주(이효정)가 자기의 참형을 주장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김종서(이순재)가 공직에서 물러나는 희생까지 감수하며 자기를 살려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김종서는 "네가 어린 세자를 지켜드릴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고 간절한 어조로 김승유에게 당부까지 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수양대군이 반란을 꾀하고 있으며 그 칼날이 맨 처음으로 향할 곳은 바로 자기 집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주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늙은 아버지의 목숨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바보가 아니고서는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심한 녀석은 오밤중에 수양대군이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와 비상이 걸렸는데도, 아무런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세령을 만나기 위해 절간으로 뛰쳐나갑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여자 생각뿐이군요..;;
게다가 사람 보는 눈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은근히 머리가 나빠 보입니다. 세령(문채원)이 수양대군의 딸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을 수도 있다 치지요. 하지만 그녀의 정체가 궁녀라고 했던 경혜공주(홍수현)의 거짓말을 왜 한 번도 의심치 않는 걸까요? 죄를 짓고 공주의 노여움을 사 궐에서 쫓겨난 궁녀라면, 어찌 양반가의 규수처럼 화려한 비단옷을 흐드러지게 차려입고 저잣거리를 팔랑거리며 활보할 수 있을까요? 입궁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왕의 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궁녀의 운명인데요.
쫓겨났다 해서 그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거라면 너도 나도 궁궐 생활이 고달플 때면 죄를 지어 쫓겨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말이 안되지요. 쫓겨난 궁녀라면 사찰에서 살더라도 마땅히 소복 차림으로 독방에 감금되어 있거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궁궐에서의 생활보다 더욱 초라하게 말입니다.
이 대책없는 순진함을 '사내대장부의 신뢰'라는 말 따위로 멋지게 포장하기에는 결과가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단종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의 부친 김종서는 결국 김승유의 멍청함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승법사에서 여리를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온 김승유는 집안에서 벌어진 참담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형 김승규는 피를 흩뿌린 채 죽어 있고 그 곁에서 형수와 어린 조카가 울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던 늙은 아버지는 곧 정신을 차리고 김승유에게 명합니다. "나의 생존을 어서 전하께 알리거라. 이 김종서가 살아있으니 절대 굴복하지 마시라고 전하거라."
유일한 버팀목이던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든 희망을 잃은 어린 임금은 곧바로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주게 될지도 모르기에, 김종서는 이 전갈이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에 김승유는 단종이 머물고 있는 경혜공주의 사가로 달려갑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천신만고 끝에 부마 정종(이민우)을 만나 김종서의 생존 소식을 전하지만, 친구에서 적으로 변절한 신면에게 들켜 붙잡히고 맙니다. 아직도 신면이 그를 친구로 여겼다면 처음부터 붙잡지 않고 몰래 내보내 주어야 마땅했지요.
기껏 자기 손으로 체포해 놓고는 잠시 후에 "그래도 네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라면서 순순히 풀어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김승유는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의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꼬리를 주렁주렁 매단 채 아버지의 은신처로 달려가는군요. 이렇게 해서 사돈집에 숨어 있던 김종서는 아들 김승유의 뒤를 따라 들이닥친 수양대군의 자객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맙니다.
'공주의 남자' 9회에서 가장 빛을 발한 캐릭터는 의외로 악역 신면이었습니다. 남녀 주인공은 계속 삽질만 하고 있고, 부마 정종 또한 아무 힘을 쓰지 못한 채 무력하게 공주의 곁을 지키고만 있을 뿐인데, 그 와중에 홀로 눈빛과 칼날을 번뜩이며 종횡무진 활약을 하고 있으니, 비록 악역이지만 돋보일 수밖에 없더군요. 생각해 보면 그의 입장도 무척이나 딱합니다. 이제껏 그의 입장이나 마음속이 자세히 조명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 신숙주와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뇌가 컸겠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데 자식으로서 아비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또한 극중의 설정상으로는 김승유가 꽤나 영특하고 잘난 남자인 듯하니,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며 수시로 김승유와 비교당하던 신면은 오랫동안 열등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 현재 김승유의 캐릭터는 전혀 잘난 남자로 안 보이지만..;;) 승유의 존재를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끼고 있던 차에, 수양이 내민 손은 일생일대의 기회로 느껴졌겠지요. 이렇게 해서 효심과 야망은 결국 우정을 꺾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자기를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는데 정작 그의 딸은 김승유와 그렇고 그런 사이이니, 세령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해도 충분히 질투심이 불타오를만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수양의 자객들은 김종서의 숨통을 끊고 나서 곧바로 김승유에게도 확인 척살을 하려 했지만, 때마침 그 자리에 도착한 신면이 극구 막아서자 할 수 없이 김종서의 수급만 가지고 수양대군에게 돌아갑니다. 신면은 칼을 맞고 쓰러져 있던 김승유가 이미 죽은 줄만 알고, 한 때 친구였던 의리를 생각해 그의 시체를 훼손시키지 않고 묻어 주려 했던 것입니다. 시체를 둘러메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무덤을 파려는데, 갑자기 김승유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아뿔싸, 이 녀석이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순간 신면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김승유를 살려 놓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거침없이 칼을 뽑아들어 내리치려고 하지만, 입에서는 고통스런 외침소리만 새어나올 뿐 좀처럼 팔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승유는 산 속에서 홀로 눈을 뜹니다. 신면은 결국 자기 손으로 김승유의 목숨을 거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면의 이러한 행동은 철면피한 악역이면서도 한 가닥의 양심을 버리지 못한 모습이라, 더욱 인간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입체감 없는 사이코패스보다는 이렇게 마음 약한 면도 남아있어야 공감이 형성되지요.
어쨌든 단 한 명이라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오늘 10회에서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 드디어 조금이라도 살아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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