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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처럼, 자기 잘못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심리일 것입니다. 그러니 변명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은 상당히 인간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겠죠. 타인의 변명을 들어주는 것은 자기 자신도 언제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며, 힘든 상황에서 더욱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상대방의 입장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니까요. 누군가의 변명을 들어주는 것은 겸허한 마음과 측은지심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매우 고상한 인격을 드러내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변명'이 적정선을 넘어 '자기합리화'의 수준으로 진행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변명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합리화는 스스로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기에, 두 가..
제가 이제껏 시청했던 모든 드라마 중 최악의 작품을 꼽는다면 지금부터는 망설임 없이 '청담동 앨리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한참 비뚤어진 주제의식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합리화시킨 대본이 문제였죠. 배우들의 연기는 괜찮았고, 연출도 그만하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가들의 썩 훌륭한 글솜씨는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건데도 어찌나 교활하게 표현하는지, 얼핏 생각하면 그들의 논리가 맞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은 '된장녀의 하소연'이라 하면 적절하겠고, 결말은 '된장녀의 완벽한 환타지 실현'이라 하면 꼭 맞겠네요. 하지만 당최 주제는 뭔지, 작가들이 이 드라마를 쓰면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차승조(박시후)가 정신질환의 일종인 조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초반부터 드러나 있었죠. 심지어 차승조의 가장 친한 친구 허동욱(박광현)의 직업은 정신과 전문의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는 친구이자 주치의로서 언제나 차승조의 정신 상태 변화를 예민하게 주시해 왔습니다. 10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았던 충격... 아버지로부터 위자료를 받아내기 위해 승조를 이용하려 했던 어머니... 어린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여과 없이 털어놓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를 이용하겠다는 뜻이다" 라고 가르쳤던 아버지... 그 후로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며 지내왔던 시간들... 그러다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 서윤주(소이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녀..
예전의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하이킥3'의 백진희는 '지붕뚫고 하이킥'의 황정음을 그대로 이어받은 캐릭터입니다. 그녀들은 전형적인 88만원 세대, 가난한 청춘이지만 언제나 밝은 얼굴로 힘차게 살아가는 아가씨들이죠. 그런데 제가 '지붕킥'에 빠져있을 당시 리뷰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예쁘고 사랑스런 황정음을 무척이나 싫어했더랬습니다. 초반에 어필되었던 된장녀스런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쇼핑 중독으로 인해 스스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씀씀이를 자랑하던 황정음은, 하다못해 신세경의 식모살이 첫 월급 50만원을 빌려다가 자기 카드값을 메꾸고는 그것을 갚지 못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매달 날아오는 카드 청구서는 그녀에게 저승사자나 다..
처음부터 껍데기뿐이었던 박하선과 고영욱의 억지 러브라인은 예상보다 더 빨리 끝나고 말았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한 달 앞두고 집중을 위해 절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고영욱은 박하선과의 짧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멋진 데이트를 선물하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자금을 준비했으나, 막상 시작된 데이트는 모든 면에서 꽝이었지요. 고시원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느라 최신 유행에는 깜깜할 수밖에 없었던 고영욱은 친구의 어설픈 조언에 따라 '현빈 츄리닝'을 커플옷으로 준비하여 박하선에게 선물하지만, 한참 유행이 지난 그 빤짝이 옷차림은 '진상 트리오' 때와 마찬가지로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늘 다니던 분식집이나 포장마차가 아니라 경양식집으로 박하선을 데려간 고영욱은 스테이크를 주문하시라고 호기..
제가 만약 2007년 초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다면, 저는 '하얀 거탑'의 장준혁 캐릭터에 대해서 거침없이 비판을 해댔을 것이며, 어쩌면 지금 제가 '하이킥'의 황정음 캐릭터를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장준혁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옳지는 않은" 캐릭터였습니다. 당시 '장준혁 신드롬'의 선풍적 인기를 기억하십니까? 그 장준혁 신드롬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만 있다면, 저는 하고 싶었습니다. 연기자 김명민에 대해서야 감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는 마음이 저도 남들과 똑같았으나, 장준혁 캐릭터에 대해서만은 남들과 다른 의견이었습니다. 장준혁은 명의(名醫)였지만, 인의(仁醫)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의사도 사람이기에, 자기 자신의 일이 환자보다 우선일 수밖에 없음..
사실 '지붕뚫고 하이킥' 에서 황정음 캐릭터의 변화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수순입니다. 그런데 역시 시트콤은 시트콤인지라, 깜찍한 된장녀가 갑자기 현모양처형 천사로 확 둔갑해 버렸네요. 예전에는 지훈(최다니엘)의 개털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골탕먹이려고 그의 방에다가 개털 폭탄을 풀어놓던 무개념 민폐녀 황정음이, 이젠 새벽부터 일어나서 그의 도시락을 싸고 있습니다. 확실히 애인일 때와 애인이 아닐 때는 무척 다르군요. 치매 환자인 할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할머니 분장까지 하고 된장국을 끓여주는 정음의 모습은, 역시 너무 과장되기는 했지만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민폐를 끼치기보다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하는 정음의 착한 마음씨가 그 동안에도 틈틈이 보였으니까요. 그 부분은 ..
'지붕뚫고 하이킥'에는 왕자님이 존재합니다. 부잣집 외아들에 직업은 의사이고, 이십대 후반의 미혼에 키 크고, 조각미남은 아니지만 미소가 아름다운 훈남이고, 성격은 약간 시크하면서도 마음은 따뜻한 남자입니다. 다름아닌 이순재옹의 아들 이지훈(최다니엘)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지훈이 그렇게 완벽한 캐릭터임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좀 둔한가봐요. 게다가 어제 '하이킥의 연인들' 특집방송을 보니까, 방송 초반에는 확실히 최다니엘과 이지훈의 싱크로율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더군요. 어딘가 어색하고 동동 뜨는 느낌이랄까? 의사 가운도 지금처럼 잘 어울리지 않았고, 대사도 좀 어색했더랍니다. 게다가 최다니엘에게는 전작에서 남겨진 '미친 양언니'의 이미지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지훈이 그렇게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