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덕만 (41)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어머니, 소자 춘추(春秋)이옵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너무 늦게 돌아와 마지막 싸늘한 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춘추이옵니다. 겨우 말을 배울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리워만 하다가 때로는 원망도 하였습니다. 저를 떠나 보내시던 그 애틋한 모습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열 밤, 스무 밤보다도 더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며 울먹이시는 어머니 앞에서, 철없는 저는 놀러가는 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었더랬지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비록 저와의 헤어짐을 슬퍼하며 울고 계셨지만, 얼마나 젊고 고우셨는지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원망합니다. 이모님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는 여전히 고..
사실 지난번에 "문노가 제자 비담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으니, 오늘은 "비담이 스승 문노께 드리는 편지"를 작성하여, 아버지같은 스승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비담의 절절한 심경을 담아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판에 염종을 따라가는 비담의 약간 뒤집어진 눈빛을 보니 도대체 이 녀석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비담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비담은 내력이 파란만장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라는 점만은 확실하지만, 아직도 선악의 경계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녀석이라 오직 다이내믹할 뿐 종잡을 수가 없어요. 캐릭터와의 감정 일치에 실패한 관계로, '선덕여왕' 37회 리뷰는 편지 형식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리뷰로 진행됩니다. 편지 시리즈를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
나, 비담은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야. 다들 알지? 하지만 이번에 밝혀진 또 다른 비밀은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어. 스승님이신 문노공이 일찌기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지금까지 숨겨 오셨던 그 대업이 바로 '삼한일통' 이라는 것 그 자체는 별로 충격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그 대업을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걸까? 대체 내가 누구이길래? 지금껏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부모이지만, 이제 나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역시 스승님이 숨겨두셨던 사주단자와 황실 서고의 기록을 통해서 나는 내 정체를 알 수 있었지. 나는 진지왕과 미실궁주의 아들, 왕자 형종(炯宗)이었던 거야. 내 신분을 알게 되자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덕만공주였어. 나는 이제껏 내가 스스로 원해서 무언가를 ..
어이 친구, 지금 나를 보고 있나? 내 이름은 비담이라고 해. 마냥 자유로운 영혼이지. 이제껏 살아오면서 크게 바라는 것도 없었어. 그저 산으로 들로 마음껏 노닐면서 한 세상 즐기고 싶었을 뿐이야. 어머니도 나를 버렸고 세상도 나를 버렸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이 세상이 꽤나 예쁘게 보였거든. 나는 원래 가진 것이 없었어. 허름한 누더기를 걸치고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언제나 하루의 먹을 것과 하루의 잠자리만 있으면 그뿐이었어. 나는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인 줄만 알았고, 남들도 모두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지. 이미 양 손 가득히 뭔가를 잔뜩 움켜쥐고서도 부족하여 더 가지려고 헉헉대는 인간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줄을 내 어찌 알았겠어? 부모가 갓난아이인 나를 버렸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아. 그럴..
비담(毗曇)아, 버림받은 핏덩이였던 너를 품에 안아 데려올 때 나 문노(文弩)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가야국의 문화공주(文華公主)이시니 나는 가야 왕실의 외손으로서 원래 신라에 기반이 없었으나, 네 어머니 미실궁주의 보살핌으로 8세 풍월주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사다함이 살아있을 때 그와의 의리가 깊었으며, 세종공과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게다가 미실궁주의 사촌인 윤궁과 혼인함으로써 인척관계가 되어 있었기에 나는 당시 완전한 미실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 아버지인 진지왕을 폐위하고 지금의 진평왕을 옹립하는 거사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미실에게서 돌아서게 된 이유를 아느냐? 그것은 바로 네 어미인 미실궁주가 대의(大義)를 외면했기 때문이니라. 지증..
너희들이 나 미생랑(美生郞)을 아느냐? 나는 10세 풍월주로서 미진부공의 아들이며 미실궁주의 아우이니라. 생전에 진흥대제께서 나를 얼마나 총애하셨는지 아느냐? 나를 자주 궁으로 부르시어 태자님들과 어울리어 춤추며 놀게 하셨느니라. 그러다가 수많은 공주들이 나의 빼어난 용모와 화술에 혹하여 먼저들 손을 뻗어오니 내 어찌 거부할 수 있을소냐? 그 일을 아신 진흥대제께서 잠시 노하셨으나 곧 슬쩍 넘어가 주셨느니라. 나를 향한 대제의 총애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법하지 않으냐? 물론 누님의 입김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야 없지만 말이다. 누님께 천신황녀의 자리를 선물한 자는 애초에 사다함이라 하겠으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던 나 미생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어찌 가능하기나 했을소냐! 비록 월천대사처럼 천문학에..
'선덕여왕' 33회는 비담(김남길)을 위한 챕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생각보다 좀 빠르고 쉽게 비담은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놈의 출생 때문에 몇달간을 부들부들 떨며 삽질하던 덕만공주(이요원)와는 달리 눈부신 속도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거친 날개짓을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살포시 피어나는 멜로 라인들이 눈에 보이는데, 현재로 봐서는 양쪽 다 비극으로 치달을 듯 싶어서 안타깝기만 하네요. 첫번째 멜로라인은, 유쾌하기는 하지만 몹시 생뚱맞은 죽방(이문식)의 소화(서영희)를 향한 연정(戀情)입니다. 죽방과 고도(류담)는 이미 소화와 더불어 좁아터진 헛간에 함께 갇힌 상태로 몇달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물론 그때는 제정신도 아니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꾀죄죄한 몰골이긴 했지요..
오늘 밤이면 '선덕여왕'을 볼 수 있겠네요. 그 생각을 하니까 기다리는 시간조차 왜 이리 지루할까요? 기다림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지극히 주관적 기준으로 매겨진 인기순위 캐릭터 열전이나 끄적거려 볼까 합니다. 제가 여성이다보니 아무래도 남성 캐릭터 쪽에 훠얼씬 눈길이 가는지라 (-_-;;) 여성 캐릭터는 난중에 난중에 생각해 보기로 쭈욱 밀어놓고 우선 귀염둥이(?) 남성 캐릭터들 먼저 한 명씩 찰칵찰칵 떠올립니다. 1. 매혹(魅惑) 비담 (김남길) 대한민국 여성 중에서 현재 비담의 매력에 푹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ㅋㅋ 저는 남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오히려 안 좋아하고, 나 혼자서만 좋아하는 누군가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어하는 독특한 성격이지만 유독 이 비담이라는 인물의 매혹은 거부..
"이건 말 그대로 그물이야, 그물... 어부가 고기를 잡듯이 화랑 낭도들이 신라의 그물이 되어서 백제 놈이고 고구려 놈이고 싹 다 잡아들이라는 거지." 놀랍습니다. 입에 담기조차 두려워할만한 엄청난 대업(大業)이요, 당대의 내노라하는 두뇌들이 단체로 골머리를 썩고 있으며, 미실이 장담하기를 그 누구도 맞히지 못할 거라 했던 그 문제의 답을 우리의 죽방 형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맞혀 버리시는군요. 신라(新羅)라는 국호의 세번째 뜻 말입니다.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신(新)을 취하고,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라(羅)를 취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 하니(삼국사기) '새로운 그물'이라, 알고 나서 보니 매우 노골적인 국호로군요. 첫째 무력을 증진하고, 둘째 신흥세력을 키워서..
"왕이 될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쉽게 하는 거 아니다." 어쩐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비담은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 자유분방한 눈빛 속에 진지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다고 스승에게 말했었다. 그러나 반드시 연민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운명적으로 끌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제와 생각하니 소화에게 안겨 피신해 온 아기 덕만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고사리 손으로 아기의 이마를 쓰다듬던 어린 비담의 모습부터가 그리 범상치는 않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그 순간 일식이 일어나면서, 덕만공주의 엄청난 존재감은 비담의 머리와 가슴을 온통 뒤덮고 말았다. 완전히 반해버린 거다. 타인의 놀라운 능력이나 매력을 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