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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개봉 전 기자들의 평점이 낮다고 해서 큰 기대를 품지 않고 관람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취향에 맞아서인지, 나에게 '역린'은 썩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평점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스토리가 매우 빈약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드는 작품이라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 스토리보다는 각각의 캐릭터에 비중을 둔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추후의 전개가 거의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한껏 비장미를 뽐내며 긴박하게 움직이는데, 관객 중 몇몇은 좀처럼 몰입이 안 되는지 줄곧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배우들의 연기에 꽤나 몰입하고 있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1777년(정조 1년)에 발생한 '정..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보이던 제국그룹의 김남윤(정동환) 회장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만약 현실이라면 그 상황에서 이런 식의 변화가 일어나리라 생각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이 드라마에서 김회장의 위독은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였다. 대략 20년 동안이나 김회장의 명목상 본처 자리를 지키며 호시탐탐 제국그룹을 집어삼킬 계획을 세워 온 정지숙(박준금) 여사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자신의 추종자들을 불러모아 총공격을 개시하고, 김회장의 반목하던 두 아들 김원(최진혁)과 김탄(이민호)는 경영권을 남의 손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연스레 화해했다. 두 형제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얕은 데다가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허를 찔렸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비서실장이었다가 ..
처음엔 특별한 개성도 없어 보이고 밋밋한 캐릭터라 생각했는데, 김탄(이민호) 이 녀석 볼수록 매력적이다. 순수가 실종된 시대에, 순수를 지닌 채로는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그 곳에서, 어떻게든 순수를 지켜 보려는 그 아이의 마지막 발버둥이 한없이 애처롭다. 물론 그 발버둥도 아직은 열 여덟 살이기에 가능한 것일 뿐, 이복형 김원(최진혁)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김탄 역시 10년쯤 흐른 후에는 형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어린 이복동생을 영영 미국으로 쫓아 보내려는 냉혹한 김원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까. 자신과 김탄의 약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과 기업의 거대한 약속이라며 차은상(박신혜)을 다그치는 유라헬(김지원)을 볼 때 너무 어른같은 모습에 나는 살짝 소름이 끼쳤는데, 사실은..
김은숙 작가의 로코물이며 수많은 청춘 스타들을 출연시킨 야심작치고는 화제성과 시청률 면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고 있던 '상속자들'이다. 일단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산만했고, 그 인물들의 제각각 스토리를 일일이 언급하며 진행되니 주인공들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 여주인공 차은상(박신혜)의 캐릭터는 흔해빠진 캔디 꼭 그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녀의 백마 탄 왕자님 김탄(이민호)의 캐릭터도 별로 신선한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못된 무법자 최영도(김우빈)는 이미지가 워낙 강렬한 데다가 그 아버지의 캐릭터가 나름 독특하여 시선을 끌었다. 김탄의 아버지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보아 왔던 재벌 회장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지만, 최영도의 아버지처럼 중후한 나이에도 깡패 수준의 저급한..
하류(권상우)는 자기를 배신하고 딸 은별이(박민하)와 쌍둥이 형 차재웅을 죽음으로 몰아간 옛 연인 주다해(수애)를 향해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하류가 그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칼날은 백학그룹의 장녀 백도경(김성령)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녀가 주다해의 약혼자 백도훈(정윤호)의 누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백창학(이덕화) 회장의 늦둥이 아들로 알려져 있는 백도훈은 사실 백도경이 18세 되던 해,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몰래 출산한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백도경은 누나가 아닌 엄마이고, 백회장은 아버지가 아닌 외할아버지가 되는군요. 극 중에서는 11회에 이르러서야 밝혀졌지만 벌써 모든 시청자가 알아차리고 있던 사실입니다. '파리의 연인' 재탕이라고 할만큼 뻔한 설정이지만, 신기하게도 백도경 캐릭터에..
정말 고마웠습니다. 끝까지 기운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텨 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드라마가 용두사미꼴의 아쉬운 결말을 면하기 힘든 현실인데,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초심을 밀고 나가며 실망스럽지 않은 최고의 결말을 마련해 주어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우리 가슴 속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 내용으로 마무리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이로써 대중적 인기를 끄는 톱스타 한 명 없이 조촐하게 출발했던 '추적자'는 놀랍게도 한국 드라마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게 되었군요. 정신도 멀쩡했고 법에 어긋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노라고, 잘못이라는 건 알지만 또 다시 그런 상황에 닥친다 해도 자신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진술..
제 생각에 요즘 '추적자'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서회장(박근형)입니다. 주인공 백홍석(손현주)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강동윤(김상중)의 존재감이 강해지긴 했지만, 아무리 몸부림쳐 봐야 서회장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소록소록 전해지는군요. 거의 표정 변화 없이 냉철하고 강인한 남자의 기상을 풍기는 강동윤의 얼굴도, 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서회장의 능글맞은 얼굴과 마주치면 삽시간에 그 빛을 잃고 맙니다. 게다가 연륜과 통찰력이 묻어나는 서회장의 기막힌 대사들이라니, 요즘은 박근형이 입만 뗐다 하면 저절로 명언 퍼레이드가 되고 마네요. 분명히 악역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회를 거듭할수록 서회장의 캐릭터에 푹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회장에게도 부인..
'추적자 THE CHASER'는 상당히 남성적이고 굵은 터치의 드라마이며 핵심 배역도 모두 남자들입니다. 처음에는 백홍석(손현주)과 강동윤(김상중)이라는 양대 기둥이 이끌어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오그룹의 노회한 구렁이 서회장(박근형)의 존재가 히든카드였군요. 게다가 평범하고 정이 많으면서도 적당히 속물적인 중년 서민의 전형같은 황반장(강신일)과 거칠지만 정의로운 젊은 지성을 상징하는 최정우(류승수) 검사 등, 탄탄한 연기력의 조연들은 잘 짜여진 대본에 힘을 더해주며 시청자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그런데 이 남성적인 드라마 속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빛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무릇 남성 위주의 드라마에서 여성들이란 그저 예쁘기만 한 민폐덩어리거나 존재감 없는 쩌리 신세에..
'추적자 THE CHASER' 제9회는 정말 슬펐습니다. 이 드라마는 1회부터 지금까지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슬픔으로 가슴을 후벼팠지만, 9회는 특히 더 슬펐습니다. 차라리 백홍석(손현주)이 조금이라도 얍삽한 인간이었다면 보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속상하진 않을텐데, 어떤 상황에서든 정면돌파를 고집할 뿐 요령이라고는 전혀 피울 줄 모르는 그 우직함이 저는 너무도 슬펐습니다. 우직하기만 하면 그래도 좀 나으련만, 지나치게 선량하기까지 한 백홍석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못 견디게 괴롭더군요. 주위를 살펴보면 백홍석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가진 것도 없으면서 퍼주기 좋아하고 너무 착해서 만날 손해만 보면서도, 남들이 안타까워하면 자기는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며 씨익 웃는 사람들... 백홍석은 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졌다는 속담이 이렇게나 절묘하게 들어맞는 상황이 있을까요? 한오그룹 총수 서회장(박근형)과 그의 사위로서 차기 대권을 노리는 강동윤(김상중)의 대결구도에 정말 우연찮게 소시민 백홍석(손현주)이 휘말려들면서 그의 가정은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목숨이 억울하게 스러져갔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당한 놈만 억울하고 약한 놈만 서러운 격이라, 절대 다수의 소시민에 속하는 시청자들은 모두 백홍석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그와 함께 울고 웃습니다. 그가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납치 등의 범죄를 저질러도 시청자는 언제나 백홍석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고 있지요. 성경 속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했지만 이 시대의 현실 속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기에, 죽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