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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박근형의 인간적 면모, 미워할 수 없는 악역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추적자

'추적자' 박근형의 인간적 면모, 미워할 수 없는 악역

빛무리~ 2012. 6.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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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졌다는 속담이 이렇게나 절묘하게 들어맞는 상황이 있을까요? 한오그룹 총수 서회장(박근형)과 그의 사위로서 차기 대권을 노리는 강동윤(김상중)의 대결구도에 정말 우연찮게 소시민 백홍석(손현주)이 휘말려들면서 그의 가정은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목숨이 억울하게 스러져갔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당한 놈만 억울하고 약한 놈만 서러운 격이라, 절대 다수의 소시민에 속하는 시청자들은 모두 백홍석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그와 함께 울고 웃습니다. 그가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납치 등의 범죄를 저질러도 시청자는 언제나 백홍석의 편이 되어 그를 응원하고 있지요. 성경 속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했지만 이 시대의 현실 속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기에, 죽은 아내와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꿋꿋이 홀로 싸우는 다윗의 처절한 몸놀림은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할 만큼 서회장의 캐릭터에 은근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치떨리는 증오심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강동윤과는 달랐어요. 물론 노익장의 위용을 제대로 과시하고 있는 박근형의 소름끼치는 연기력도 호감을 얻는데 단단히 일조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유자재로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는 박근형의 연기는 이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군요. 강하면서도 유연하고 능글맞은 서회장의 캐릭터는 박근형의 열연을 만나,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한 마리의 커다란 뱀처럼 입체적인 인물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원래 악역은 배우가 연기를 잘 할수록 더욱 밉살스러워지는 법인데, 서회장에게는 따스한 애정이 자꾸만 생겨나니 묘한 일이었지요.

 

배우의 연기에 감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라 캐릭터 자체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몇 주 전부터 했었는데 드디어 그 실체를 잡아낼 수 있었군요. 8회 초반에 큰 딸 서지수(김성령)와 대립하던 장면, 그리고 중반쯤에 아들 서영욱(전노민)의 손을 잡고 추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였습니다. 그 장면들을 보고 나니 불현듯 서회장에게 깊은 연민이 느껴져서, 하마터면 그 무서운 구렁이를 힘없고 가여운 노인네라고 생각할 뻔했습니다. 한창 연민의 감정에 휩싸여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며 형형한 독사의 눈빛을 쏘는 바람에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네요. 박근형씨 정말..;;;

 

 

서회장은 여타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재벌 회장들의 캐릭터와 확연히 비교되는 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아내를 향한 일편단심이고, 둘째는 냉철한 이성을 억압할 정도로 극진한 자식 사랑입니다. 우선 죽은 아내를 향한 서회장의 진실한 사랑은 두 차례에 걸쳐 큰 딸 서지수와의 대화를 통해 증명되었지요. 지난 몇 회였던가, 서회장은 남편 강동윤에게 집착하는 서지수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지수야, 사람이 뭔가를 간절히 갖고 싶을 때는 진짜로 그게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내 앞에 없으니 만지고 싶고 주머니에 넣고 싶고 그래 안하면 죽어버릴 것 같고 그런 기다. 그런데 막상 내 것이 되면 아, 내가 이런 걸 왜 그리 갖고 싶어했노, 그런 기다. 참말로 내 맘이 원하는 건지 아닌지, 내 앞에 없으니 가지고 싶어 그러는지, 갖고 나면 후회할는지 그걸 알고 싶으면, 지수야... 떨어져 있어보면 안다. 1년이고 2년이고 멀찌기 떨어져 있어봐라!" 

 

서지수는 자기를 떨어뜨려 놓고 강동윤을 치려는 아버지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반격의 샷을 휘둘렀습니다. 그 땐 몰랐던 사실이 8회에 밝혀졌는데, 죽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 큰 딸 지수 혼자뿐이었군요. 그 날 이후 어머니의 존재는 날카로운 무기처럼 지수의 손에 쥐어졌고, 그녀는 아버지와의 대립에서 불리해질 때마다 그 무기를 사용해 왔던 모양입니다. "아빠도 엄마를 놓지 못하셨잖아요. 멀리 떠나겠다는 엄마를 말릴 수가 없어서 보냈지만, 결국 몇 개월을 못 버티고 다시 데려오셨잖아요. 죄송해요, 아빠.. 난 아무래도 아빠를 닮았나봐요!" (이건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쓴 거라 정확한 대사는 아님..;;)

 

서지수의 대사 내용으로 보아, 서회장은 죽은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지만 아내의 사랑은 얻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참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되었지요. 무릇 재벌 회장들이란 공공연히 삼처사첩을 거느리고 비공식적으로 수십명의 애인을 두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현실적으로도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고 여타의 많은 드라마들 속에서도 재벌 회장 캐릭터는 그렇게 표현되어 왔지요. 그래서 재벌2세 캐릭터는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남매들이 줄줄이 등장하게 마련이었는데, 서회장에게는 그 흔한 서자(서녀)가 한 명도 안 보이는군요. (혹시 나중에 뒤통수 치며 등장하려나?;;) 어쨌든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서회장은 평생토록 조강지처만 사랑하다가,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홀로 그리움을 달래며 사업에만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평범한 소시민들 중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순정이네요.

 

 

그런데 남편 강동윤의 편에 섰다가 서회장에게 버림받은 서지수는 악에 받쳐서 최후의 칼날을 뽑아들고 아버지에게 비수를 꽂습니다. "나, 아빠한테 거짓말한 거 있어요. 엄마 돌아가시던 날, 나 혼자 병원에 있었잖아. 마지막 말... 혼자 들었고... 아빠한테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근데 아빠, 그거 거짓말이에요. 엄마는 이랬어. 네 아빠 믿지 마. 숨소리까지 거짓말이야! .. 딸들이 이래요. 엄마 말 안 듣다가 나중에 후회한다니까..!"  서지수가 말한 엄마의 유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솔직히 제 생각엔, 임종의 순간에까지 자식에게 그런 말을 해서 아비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주는 어미가 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드네요. 아무리 남편이 밉다 해도 말입니다. 어쩌면 서지수가 홧김에 지어낸 말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쨌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서회장의 표정은 굳어졌고,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슴이 아팠어요.

 

서회장의 두번째 특징은 자식을 향한 극진한 사랑인데, 그게 공평하진 못하고 현격한 차등이 있군요. 그가 직접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큰아들이자 외아들인 서영욱을 향한 서회장의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고 지극한지를 말이죠. 사실은 좀 이상했습니다. 아무리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지만, 그 방대한 사업을 물려주기에는 도통 깜냥이 안 되는 녀석으로 보였거든요. 하는 일마다 크게 말아먹고, 매사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민폐만 끼치는 못난이인데, 물려줘 봤자 얼마 버티기나 하겠습니까? 기업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자식 셋 중에 가장 똘똘해 보이는 막내딸 서지원(고준희)을 선택하든가, 그게 여의치 않다면 차라리 똑똑한 양자를 들여서 회사를 물려주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안일텐데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잔인하고 냉혹한 구렁이 같은 서회장은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아들바보였습니다.

 

"입 달린 놈들은 다 그러더라, 네가 회장 그릇이 아니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이 자리에 앉히고 싶어하는 줄 아나? 영욱아, 나는 네가 참 좋다. 네가 걸음마 뗄 때, 앞차에 너하고 너희 엄마가 타고, 내가 뒤에서 차를 몰고 가는데, 이 돌도 안 지난 놈이 차 뒷유리에 탁 붙어서 뒤에서 차 몰고 오는 나한테 손을 막 흔드는기라... 공사단가를 어떻게 후려쳐서 이득을 남기나 요런 계산을 하고 가다가 너를 보는데... 먹먹해지면서... 얄궂제? 눈물이 날라고 하는기라... 나한테 영욱아, 너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기다. (영욱이 죄송하다고 하자) 아니다. 자식 못난 게 제 탓인가, 애비 탓이지. 너한테는 아무 일 없도록 할거구마!" 저를 울려버린 서회장의 대사는 바로 이거였습니다.

 

 

그릇이 안 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냉철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게 할 만큼, 아들 영욱을 향한 서회장의 눈먼 사랑은 그토록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벌써 쉰 살이 다 되어가는 아들인데, 아버지의 눈에는 채 돌도 못 된 아기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극진히 사랑했던 아내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낳아준 아이여서 그 감동과 기쁨이 극대화되었던 게 아닐까 싶군요. 이젠 자식도 낳았으니 아내의 마음도 흔들림 없이 자기 곁에서 안정되리라 믿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자기에게 냉랭한 아내의 태도를 보고는 실망해서, 둘째 셋째로 태어난 딸들에게는 아들만큼의 애정을 주지 못한 게 아닐까, 뭐 대략 그런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둘째 이유는 자식들 중에도 가장 어리숙하고 마음 여린 서영욱의 인품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회장이 큰 딸 지수를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영욱은 몇 차례나 극구 말리면서 동생을 버릴 수는 없다고, 다시 생각하시라고 간청했었지요. 보통의 재벌 회장이라면 그런 자식을 못난이라고 미워하게 마련인데, 역시 서회장의 캐릭터는 독특합니다. 공사단가를 후려쳐서 이윤을 남기겠다는 계산을 하며 운전하고 가다가, 문득 어린 아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던 젊은 날의 기억이 왠지 예사롭지가 않아요. 강한 새끼만 키우고 약한 새끼는 버리는 것이 호랑이의 육아법이라는데, 서회장은 호랑이가 아닌가봅니다. 삭막한 일상 속에서도 따스한 인간성을 잊지 않게 해주는 영욱의 비교적 순수한 인간성이,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가봐요.

 

그토록 귀히 아끼는 아들인데, 몇년 전 감히 객식구에 불과한 강동윤 따위가 영욱을 공격해서 극심한 타격을 입혔으니, 그 날 이후로 서회장이 사위를 인간대접 안 해 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좋지 않군요. 자기네 측에서 백홍석을 붙잡은 줄만 알고 있는 강동윤은 마냥 건방지게 장인을 압박합니다. 서회장이 직접 몸을 움직여 2층으로 올라가 협상을 요청하지만,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강동윤은 서회장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서영욱의 법정구속을 약점으로 물고 늘어지니 서회장은 점점 수세에 몰리네요. 그런데 때마침 유태진 선거캠프의 장병호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백홍석이 직접 찾아왔으니 곧바로 기자회견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판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하루종일 내리는 소나기가 어디 있겠노? 곧 날이 갤거다, 아마..." 서회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유유히 나가버리고, 강동윤은 이제 곧 모든 것을 잃게 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소리내어 통곡을 합니다. 백홍석의 기자회견이면 강동윤의 범죄행각은 만천하에 공표될 것이고, 그의 정치 인생은 여기서 끝장나고 말 테니까요. 그러나 만능 여비서 신혜라(장신영)가 다시 한 번 묘책을 짜내는군요. 서지수를 설득하여 백수정 사망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녀 혼자서 뒤집어 쓰라고 한 겁니다. 아직도 남편 강동윤을 사랑하는 서지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네요. 이렇게 해서라도 정치 생명을 보존하고, 이번 대선은 포기하더라도 5년 후, 10년 후를 기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강동윤은 계속 여자들의 치마폭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는군요..;;

 

어쨌거나 냉혹한 구렁이 서회장의 인간적 면모를 발견한 것은 8회의 큰 소득이었습니다. 물론 서회장은 강동윤 못지 않은 악역이지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잔혹한 일을 많이 저질렀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손아귀에 억울한 파멸을 맞이했겠습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별로 드러난 바가 없어서인지 크게 악해 보이지도 않는군요. 예를 들어 강동윤은 어린 소녀 백수정을 죽이라고 직접 지시를 내리는 등의 극악한 면모를 드러냈지만, 서회장은 줄곧 강동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군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어요. 저는 최종 승리가 백홍석에게로 돌아가길 바라지만, 서회장과 강동윤의 대결에서는 서회장이 승리하길 바랍니다. 최소한 가족에게만은 더없이 진실한 사랑으로 대하니, 시종일관 얼음장같은 강동윤보다야 훨씬 따스하고 매력적인 사람 아니겠습니까!

 

 

"자식 못난 게 제 탓인가, 애비 탓이지!" 아들 영욱을 토닥거리며 말했던 서회장의 이 대사를 무척 인상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황반장(강신일)이 자기 아들을 두고 똑같은 대사를 하길래 흠칫 놀랐습니다. "자식 못난 게 어디 제 탓인가, 부모 탓이지!" 논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감성적인,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뚝뚝 떨어지는 저 대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강한 캐릭터들 사이의 기싸움이 하도 치열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드라마의 최대 목적은 아버지의 절절한 부성을 그리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추적과 싸움은 부수적인 장치일 뿐, 시청자의 마음을 가장 뒤흔드는 건... 딸 수정이를 향한 아버지 백홍석의 마음... 아들 영욱을 향한 아버지 서회장의 마음... 그리고 평범한 자기 아들을 향한 황반장의 마음...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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