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책과 영화와 연극 (62)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 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 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정호승 '그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의 '그는'이다. 왠지 읽을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파와서 아주 가끔씩만 펼쳐보는 시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이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곧은 나무는 맨 먼저 잘려지고 맑은 샘물은 맨 먼저 바닥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무지를 부끄러워한다면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보다 돋보이기를 원한다면 빛이 그대 둘레에 내리비칠 것이다. 마치 그대가 태양과 달을 삼킨 것처럼. 그렇게 되면 그대..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내가 그린 최초의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 놓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주인 없는 개를 보살펴 주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동물들을 잘 대해 주는 것이 좋은 일이란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난 신이 존재하며, 언제나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내게 입맞추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때로는 인생이라는 것이 힘..
감독 정주리 출연 배두나, 김새론, 송새벽 외 개봉 2014년 5월 22일 출연 배우들의 이름과 짧은 내용 소개만으로 강한 끌림을 느꼈기에 영화 '도희야'가 개봉하는 첫날 첫회 상영을 보러 갔다. 나를 가장 강렬하게 유혹한 것은 다름아닌 김새론의 연기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역들의 존재감은 성인 배우들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도희야'에서의 김새론은 단순한 아역이 아니라 배두나와 쌍벽을 이루어 작품의 균형을 잡는 당당한 주인공이었다. 한편 그녀들을 괴롭히는 송새벽의 악역 연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런 인간'들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자연스러워서 시종일관 소름이 끼쳤다. 작품의 배경이자 주요 촬영지는 전남 여수의 외딴 섬 금오도였다고 한다. 풍광이 아름다워 관광지로도 유명하다는데, 아직..
개봉 전 기자들의 평점이 낮다고 해서 큰 기대를 품지 않고 관람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취향에 맞아서인지, 나에게 '역린'은 썩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평점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스토리가 매우 빈약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드는 작품이라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 스토리보다는 각각의 캐릭터에 비중을 둔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추후의 전개가 거의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한껏 비장미를 뽐내며 긴박하게 움직이는데, 관객 중 몇몇은 좀처럼 몰입이 안 되는지 줄곧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배우들의 연기에 꽤나 몰입하고 있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1777년(정조 1년)에 발생한 '정..
영화 '권법'에 캐스팅되었던 배우 여진구가 느닷없이 일방적 하차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여진구를 대신하여 캐스팅 물망에 오른 인물이 바로 김수현이라는 소식을 더해 들으니 결국은 제작사측의 욕심 때문 아닐까 싶다. 김수현은 최근 '별에서 온 그대'가 중화권에서 큰 인기를 끌며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고, 영화 '권법'은 CJ엔터테인먼트와 중국 국영 배급사 차이나필름그룹 등이 공동 투자 및 제작 배급을 맡은 작품이므로 충분히 김수현을 욕심냈을 법하다. 하지만 캐스팅되었던 배우에게 일방적 하차를 통보한 무례함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미 김수현 측에서도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니 어찌 낭패가 아닐소냐! '권법'은 '웰컴 투 동막골'의 박광현 감독이..
영화의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방황하는 칼날... 한 소녀가 잔인하게 성폭행 당하며 살해되었는데 가해자들은 미성년이라 붙잡혀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될 상황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직접 가해자들을 찾아다니며 피의 복수를 진행하고, 자식 잃은 아버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살인을 막기 위해 그를 체포해야만 하는 형사들은 깊은 고뇌를 한다. 어차피 이와 같은 스토리에 해피엔딩이란 있을 수 없다. 복수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버지는 그토록 사랑하던 딸을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복수에 실패했을 경우 남는 것은 뼈아픈 절망뿐이며, 복수에 성공했을 경우 남는 것은 자식을 잃어버린 또 다른 부모들이다.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행복의 가능성은 말끔히..
우연한 기회에 영화 '노아'를 보게 되었다. 사전 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주어진 기회였고,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 성경 속의 인물 '노아'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한 마음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웅장한 스케일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는 했는데, 영화의 사운드에 따라 진동하게 만들어진 좌석은 매우 불편했다. 진동이 부담스러우면 컵홀더 아래의 스위치를 끄라는 안내가 나오길래 스위치를 찾아 껐는데도, 주변 의자들이 한꺼번에 진동하기 때문인지 별 효과가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진동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내 경우는 오히려 영화 관람에 큰 방해가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스마트폰에 설치되어 있는 '가톨릭 굿뉴스' 앱을 열어 성경의 창세기 부분을 살펴보는 ..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중 하나이다. 사주나 타로 등의 점술이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흥행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1990년에 발표된 영화 '백 투더 퓨처2'의 내용을 기억하시는가? 30년 후의 미래로 시간 여행을 갔던 주인공 '마티'는 과거 50년 동안의 스포츠 경기 통계가 담겨 있는 책 한 권을 가져오려다가 '브라운' 박사의 만류로 실패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은 악당 '비프'가 타임머신을 훔쳐타고 더 오래 전의 과거로 달려가 그 스포츠 연감을 젊은 날의 자기 자신에게 전해주면서 모든 현실은 달라졌다. '비프'는 단지 스포츠 경기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른 '비프'의 악행..
비록 관객수에서는 봉준호 송강호 콤비의 '설국열차'에 뒤지고 있지만 '더 테러 라이브'의 선전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 김병우의 입봉작이라는 것과 35억이라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곳곳에 헛점이 약간 드러난다 해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박수쳐 주고픈 작품이었어요. 무엇보다 제가 칭찬하고 싶었던 핵심은 좀처럼 선악을 구분하기 힘든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관객의 공감을 효과적으로 불러 일으킴으로써 주제 전달에 성공했다는 점이었죠. 그런 점에서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보다도 한 수 위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테러범과 민준국(정웅인)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요.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