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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러 라이브' 민준국을 닮은 테러범, 공감에 성공한 이유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더 테러 라이브' 민준국을 닮은 테러범, 공감에 성공한 이유

빛무리~ 2013. 8. 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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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관객수에서는 봉준호 송강호 콤비의 '설국열차'에 뒤지고 있지만 '더 테러 라이브'의 선전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 김병우의 입봉작이라는 것과 35억이라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곳곳에 헛점이 약간 드러난다 해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박수쳐 주고픈 작품이었어요. 무엇보다 제가 칭찬하고 싶었던 핵심은 좀처럼 선악을 구분하기 힘든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관객의 공감을 효과적으로 불러 일으킴으로써 주제 전달에 성공했다는 점이었죠. 그런 점에서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보다도 한 수 위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테러범과 민준국(정웅인)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요.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마치 애먼 곳에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죠. '너목들'의 경우, 민준국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시청자는 이해하거나 동정하기보다 분노를 발산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민준국이 어떤 말을 해도 시청자의 귀에는 뻔뻔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죠. (물론 다른 캐릭터들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달하긴 했지만) 민준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사람보다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혹은 아예 들어 볼 필요조차 없다는) 사람이 더 많았음을 생각한다면, 박혜련 작가가 이보영과 이종석의 멜로 부분에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주제 전달에는 약간 실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더 테러 라이브'를 감상하던 저는 기이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테러범의 입장에 공감하며, 그의 고통과 분노를 함께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저 무심히 마포대교 위를 지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그에겐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선량한 다수를 향해 눈 먼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테러범의 행동은 민준국보다 더 악하면 악했는데도 말이죠. '더 테러 라이브'의 러닝타임 97분은 온통 분노로 가득합니다. 다만 그 분노의 대상이 점차로 이동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제 분노의 화살은 가장 먼저 무책임하고 탐욕스런 언론인들을 향했습니다. 생방송 진행 중 신원미상의 청취자로부터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게 된 라디오 앵커 윤영화(하정우)는 유치한 장난이라 여기며 무시했는데, 잠시 후 실제로 마포대교 한 가운데 부분이 폭파되면서 상황은 몹시 심각해졌죠.

 

 

하지만 앵커 윤영화와 편집국장 차대은(이경영)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피해자들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출세와 영달을 우선시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전화하겠다던 테러범의 약속(?)을 상기한 윤영화는 '테러범과의 통화 생중계'라는 전대미문의 아이템을 생각해냈고, 청취율 특종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한 차국장은 위급 상황을 신고하기보다 테러범의 전화를 기다려 보는 쪽으로 행동 노선을 정하게 되죠. 물론 그 상황에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 해도 마포대교에 발이 묶여 있는 인질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특종으로 거머쥐게 될 승진과 포상을 미리 만끽하며 흥분해 있는 윤영화와 차국장의 모습은 더없이 추악해 보였답니다. 그래도 주인공 윤영화는 점차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다행이었지만...

 

두번째 분노의 화살은 역시 목소리만 들리는 테러범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년째 건설 노동을 하고 있는 박노규'라고 자기 신분을 밝힌 테러범은 2년 전 마포대교 보수 공사 중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동료 3명의 죽음을 언급하며 분노를 터뜨렸죠. 늦지 않게 구조만 했어도 살릴 수 있었던 목숨들인데 하필 '세계 선진국 정상회담'이 열리던 기간이라 모든 경찰병력은 그 쪽에만 집중되었고, 애타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마포대교를 지나던 시민들과 무슨 상관이라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며 자기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테러범의 행동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었죠. "아무도 내 말은 들어주지 않는데 어떡해?" 라고 민준국이 외쳤지만 모두들 코웃음치며 "그렇다고 그러면 돼?" 했던 것처럼, 이 테러범의 악행에도 변명이나 동정의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번째 분노의 화살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가더군요.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윤영화의 질문에 박노규는 '대통령의 사과'라고 대답했죠. 21억원의 보상금을 선지급하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과'였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라디오를 통해 사과 한 마디만 하면, 자기는 즉시 테러 행위를 멈추고 자수하겠다면서 말이에요. 솔직히 처음 그 요구 조건을 들었을 때는 웃긴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대통령이 무슨 앞집 강아지도 아닌데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올 거라 생각하는 그 유아적인 발상이 황당하다 싶었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말로 하는 사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라 "툭 던지면 그뿐인 한 마디가 뭐 대단하다고 저런 짓을?" 하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 이후 내용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절정에 치달을수록 점점 커져가는 것은 테러범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분노였습니다. 대통령을 대신해 그 자리에 나왔다는 경찰청장은 몰염치한 권력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는데요. 수많은 시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인데도 그는 전혀 사과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강압적이고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테러범을 자극했죠. 심지어 "네 아들의 사진을 방송에 공개하겠다. 평생 살인범의 아들로 살아가야 할텐데,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 순간, 테러범은 참지 못하고 인이어 폭탄의 스위치를 눌러 버렸군요. 경찰청장의 양쪽 귀에서 분수같은 핏물이 솟구치며 쓰러질 때, 솔직히 저는 끔찍함보다 통쾌함을 느꼈답니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테러범은 여전히 '한 마디의 사과'만을 원하고 있을 뿐인데, 사과 대상으로 지목된 '권력'은 좀처럼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테러의 위협은 강도를 높여가고 마포대교에서는 추가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온다 온다 하면서 오지 않는 '권력'은 마치 사람을 약올리는 듯했죠. 알고 보니 '권력'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과'할 '의지'는 더욱 한 톨도 없었습니다. '권력'의 눈으로 볼 때 테러범의 간절한 요구는 어린애 투정처럼 우스울 뿐이었고, 인질로 묶여 있는 수백 명 시민의 목숨조차 그 안중에는 없었던 거죠. 그러한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끝내 충실히 행한 것은 차대은 국장이었습니다. "어차피 인질은 구할 수 없다. 그들이 죽어야 테러가 끝난다. 대통령은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고 지금 방송해라!" 어쩌면 사람 목숨을 저렇게 껌딱지처럼 여길 수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저도 테러범의 요구가 황당하고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비극이 커져갈수록 증오하게 되는 것은 그 유치한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는 '권력'의 행태였습니다. 그까짓 사과 한 마디가 뭐라고, 그 한 마디면 이 모든 비극을 멈출 수 있다는데, 고개 한 번 숙이면 높으신 품격에 손상이라도 간다는 건지, 수많은 사람의 목숨보다 권위를 더 소중히 여기는 '권력'의 작태는 정말 역겹더군요. 윤영화는 차국장의 지시에 불응하며 계속 테러범을 설득하고 인질들을 구하려 애썼죠. 비록 이혼했지만 그는 아직도 아내였던 이지수(김소진) 기자를 사랑하고 있었나봐요. 이지수는 마포대교 상황을 생중계하러 나갔다가 시민들과 함께 인질이 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어떻게든 아내를 구하려는 윤영화... 어떻게든 '권력'의 사과를 듣고 싶어하는 테러범... 통화가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간절해졌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히 버티는 '권력' 앞에서, 두 사람의 존재는 벌레처럼 하찮을 뿐이었네요. 분명 초반에는 언론(윤영화)의 부패와 탐욕을 향해 분노했고, 그 다음에는 테러범의 무모한 복수 방식에 분노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피해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테러범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을 때 그와 함께 분노하며 울먹였고, 윤영화가 피 맺힌 얼굴로 절규할 때 그와 함께 절망하며 소리치는 심정이었어요. 윤영화와 테러범은 둘 다 악(惡)에 가까운 인물로서 결코 선(善)이 아닙니다. 하지만 더욱 커다랗고 견고한 악에 마주했을 때, 힘 없는 자들의 악은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이었죠.

 

 

민준국의 목소리에는 단 몇 사람만이 귀를 기울였지만, 테러범 박노규의 목소리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엔딩 무렵, 테러범의 진짜 정체가 드러났을 때는 슬픔과 동정심이 더욱 깊어지더군요. 극단적인 메시지를 여과 없이 수용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이쯤 되면 작품의 주제는 더할 수 없이 분명하게 전달된 셈 아닐까요? 관객들이 악인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공감하게 만든 제작진의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여겨지며, 김병우 감독의 차기작이 더욱 기대됩니다. 하정우의 명품 연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요..^^

 

*** 이미지는 모두 인용을 위해 삽입되었으며, 저작권은 제작사인 '씨네 2000'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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