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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한국 드라마에서는 결혼식의 배경으로 유난히 성당을 많이 찾는다. 주인공들이 천주교 신자이든 아니든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그저 결혼식 장면이 필요할 때가 되면 아무 이유 없이, 필요한 절차도 모두 생략한 채 성당에서 아주 쉽게 결혼들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굳이 성당을 배경으로 결혼식 장면을 찍어 내보내는 드라마 제작진의 선택이 매번 탐탁치 않았다. 반드시 성당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면 모르되, 일반 예식장을 배경으로 해도 나름대로 엄숙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는 충분히 조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생뚱맞은 성당 결혼식 장면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깊이 감동하는 순간이 왔다. 물론 '못..
지금까지의 상황을 볼 때 '응답하라 1994'의 남주인공은 쓰레기(정우)임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초반에 주인공의 존재감을 강력히 어필해야 한다는 드라마의 법칙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제작진은 무려 1~6회에 걸쳐 쓰레기의 존재감을 공들여 어필했다. 집에서는 쓰레기처럼 뒹굴며 지저분하고 게으르게 지내지만, 밖에서는 멀끔한 외모의 천재 의대생이며 운동 실력까지 뛰어나서 온갖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의 반전 매력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여주인공 성나정(고아라)의 친오빠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난 후 단짝 친구였던 그를 대신하여 나정이의 든든한 오빠로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로맨틱하고 가슴 찡한 스토리 역시 쓰레기의 몫이었다.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 만든 캐릭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건 어불..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타겟을 잘못 잡았다. 연장 반대 서명까지도 좋다. 그것은 소신에 따른 행동이니까 '오로라 공주'라는 드라마가 연장 방송되는 것이 싫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연장 반대 서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쓰레기 드라마가 자꾸 만들어지는 것은 계속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저급한 문화 양산의 책임을 대중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오로라 공주' 연장 반대 서명 관련 기사에서 가장 추천수가 높은 댓글들을 보면 "이런 쓰레기 드라마를 보고 있는 인간들이 등신이네" 라든가 "욕하면서도 보는 아줌마들이 제일 멍청이다!" 하는 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에게 흉악한 욕설까지 퍼..
기발함과 섬뜩함과 유쾌함이라는 세 가지 상반된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김병욱의 능력은 역시 탁월하다.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나쁜 짓을 하면은~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우리에게 들키지~♬" 추락사고 이후 기억상실증으로 7세 어린이가 되어버린 노민혁(고경표)은 줄곧 1991년 그 당시 한창 유행했던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를 태블릿 PC로 되풀이해 보면서 그 주제곡을 불러댔다. 나와 함께 '감자별'을 시청하던 신랑이 어느 날 갑자기 물었다. "왜 하필이면 저 노래일까요?" 나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그 때 유행했던 만화라서겠죠.." 하지만 알고 보니 그냥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 당시 인기를 끌었던 만화가 한 두 편은 아닐진대, 그 중에서 하필 '날아라 슈퍼보드'가 선택된 것은 치밀한 계획..
황마마(오창석)의 캐릭터에 치를 떨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오로라 공주'라는 작품을 통해 임성한 작가에게 극도로 실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세간의 따가운 눈총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녀의 작품을 호의어린 시선으로 즐겨 보던 나였지만, 도저히 이 작품은 기분 좋게 보아낼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계속 보고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일종의 중독일까? 그냥 무심히 보고 있을 뿐 더 이상 실망할 것도, 더 이상 할 말도 없을 줄 알았다. 스트레스를 못 견딘 오로라가 양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우고 미친듯이 "What can I do~"를 부르며 시누이들에게 술주정하던 장면에서도 그저 기막혀 웃었을 뿐 더 이상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 1..
화제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나는 안 봤다. 일부러 안 본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안 봤다. 결혼 전이었던 작년이나 결혼 후인 지금이나, 내가 사는 집은 이상하게 케이블과는 친하지 않은 편이라서 시청이 번거로웠던 이유도 있다. 하지만 올해는 일부러 맘 먹고 '응답하라 1994'를 1회부터 꾸준히 보는 중이다. 물론 사정상 본방사수는 불가능하지만..;; 포괄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는 있다. 나 또한 그 시절을 온 몸으로 관통하며 살아왔던 세대인지라, 나름 추억돋는 장면들이나 OST도 꽤 많았다. 중간 중간 미심쩍은 부분들도 있지만 대충 그러려니 넘기면 될 일이고... 무엇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몰입'이었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나는 몰입이 되지 않으면 도통 재..
오랫동안 고민하고 아파했던 것에 비해 근본적 문제 해결은 허망하도록 쉽게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자기 영혼을 팔아서라도 공씨 형제를 파멸시키고 싶어하는 듯했던 이경태의 부친(안석환)은 뜻밖에도 울며 불며 사죄하는 공준수(임주환)의 진심을 받아들였고,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별다른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동생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려(...다가 말았지만)는 공준수의 희생 정신을 목격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 완고한 노인의 피맺힌 원한이 삽시간에 풀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결과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을 모두 외면하고 진실을 감추기 위해 죽음을 택하려던 공준수의 선택은 몹시 실망스러웠는데, 그 억지 설정이 노인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구실로 사용되니 더욱 실망스러웠다. ..
김병욱 시트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웃음의 미학과 슬픔의 미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뿜어내는 중독적 카타르시스라 할 것이다. 등장인물 각각의 캐릭터가 아주 극적이면서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시청자의 강한 몰입을 이끌어 낸다는 특징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외에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미스테리 요소를 집어넣어 추리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인데, 김병욱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단 미스테리가 삽입되면 극의 전개는 훨씬 생동감 있고 흥미로워진다. 대표적으로는 '하이킥' 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던 '거침없이 하이킥'을 들 수 있겠다. 풍파 고등학교의 히로인 강유미(박민영)와 그 가족들의 미스테리한 정체는 무려 167회에 달하는 긴 시트콤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끝없는 이..
김은숙 작가의 로코물이며 수많은 청춘 스타들을 출연시킨 야심작치고는 화제성과 시청률 면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고 있던 '상속자들'이다. 일단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산만했고, 그 인물들의 제각각 스토리를 일일이 언급하며 진행되니 주인공들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 여주인공 차은상(박신혜)의 캐릭터는 흔해빠진 캔디 꼭 그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녀의 백마 탄 왕자님 김탄(이민호)의 캐릭터도 별로 신선한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못된 무법자 최영도(김우빈)는 이미지가 워낙 강렬한 데다가 그 아버지의 캐릭터가 나름 독특하여 시선을 끌었다. 김탄의 아버지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보아 왔던 재벌 회장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지만, 최영도의 아버지처럼 중후한 나이에도 깡패 수준의 저급한..
내가 김병욱 시트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김병욱이 그려내는 것만큼 미칠 듯 설레면서도 저절로 가슴이 시려오는 멜로 장면들을 본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잔인하다 싶을 만큼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는 작품들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달랠 수 있다. '감자별 2013QR3'은 초반부터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더니 불과 13회만에 기쁨과 슬픔, 설렘과 떨림, 격정과 원망, 애틋함과 그리움 등의 감정을 모조리 담아낸 러브라인이 시청자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도대체 김병욱은 얼마나 공들여서 이번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직 초반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기존의 다른 작품들을 훨씬 뛰어넘는 완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