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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별' 한 편의 시(詩)와도 같은 김병욱의 멜로 장면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감자별 2013QR3

'감자별' 한 편의 시(詩)와도 같은 김병욱의 멜로 장면들

빛무리~ 2013. 10. 3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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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병욱 시트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김병욱이 그려내는 것만큼 미칠 듯 설레면서도 저절로 가슴이 시려오는 멜로 장면들을 본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잔인하다 싶을 만큼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는 작품들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달랠 수 있다. '감자별 2013QR3'은 초반부터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더니 불과 13회만에 기쁨과 슬픔, 설렘과 떨림, 격정과 원망, 애틋함과 그리움 등의 감정을 모조리 담아낸 러브라인이 시청자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도대체 김병욱은 얼마나 공들여서 이번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직 초반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기존의 다른 작품들을 훨씬 뛰어넘는 완성도와 퀄리티를 보이고 있다. 하필 이런 작품이 케이블에서 방송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케이블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공중파에 비하면 시청률 면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까,

 

 

11회와 13회에서 김병욱은 시청자의 뒤통수를 연달아 두 번이나 때렸다. 11회에서는 늘상 곁에 있을 것만 같던 홍혜성(여진구)이 갑자기 사라져 버림으로써 나진아(하연수)를 멘붕 상태로 이끌었고, 13회에서는 머리를 다친 후 기억상실증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노민혁(고경표)이 나진아와 극적으로 재회하며 예상치 못한 달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막힌 조율이다. 기존의 구도에서는 도저히 노민혁이 홍혜성을 당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로써 완벽한 삼각관계의 러브라인이 구축되었다. 일당백의 막강 존재감을 자랑하던 홍혜성은 깊은 여운을 남긴 채 불현듯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오만한 싸가지 왕자님 노민혁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멜로의 전면으로 급부상했다. 게다가 노민혁의 새로운 캐릭터는 연기자 고경표에게 맞춘 듯 잘 어울리니, 이제 여진구의 홍혜성과 제법 팽팽하게 맞설 수 있을 듯 싶다.

 

아, 내가 어리석었다. 기억상실증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노민혁은 절대 나진아와 멜로를 이어갈 수 없을 줄 알았다. 다시 사랑한다 해도 기억이 되돌아온 후에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알았을까? 일곱 살 노민혁과 스물 네 살 나진아의 케미가 이토록 절묘하고 아름다울 줄이야! ... 일곱 살 노민혁은 더없이 순수하고 솔직했다. 속으로는 분명 나진아에게 끌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갖은 폼이나 잡고, 때로는 맘에도 없는 독설을 퍼부어 나진아에게 상처를 주던 스물 아홉 살 노민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어쨌든 나진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노민혁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스물 아홉 살 노민혁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며 각종 핑계거리를 만들어 그녀를 곁에 두었지만, 일곱 살 노민혁은 처음부터 나진아에 대한 호감을 숨기려 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했다.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노민혁의 예전 모습은 고경표와 지독히 안 어울려서 미스캐스팅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김병욱은 고경표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진아의 마음 속에는 이미 홍혜성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 나진아의 척박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홍혜성은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며 안식처였다. 괜한 쑥스러움에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홍혜성은 나진아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연인이었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만 같았기에 전화번호조차 묻지 않았던, 어느 새 그녀 자신처럼 익숙하고 친해져 버린 사람... 하지만 그는 사라져 버렸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갈 때도 예고나 인사 따위는 없었다. 그제서야 나진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의 전화번호는 커녕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이것은 가장 잔인한 배신이다. 가로등조차 없는 철거촌의 캄캄한 밤에 무서웠던 귀가길마다 함께 해 주던 그의 든든한 어깨... 소행성 감자별이 지구로 돌진해 오던 밤, 운명처럼 짜릿했던 첫 키스... 정든 집에서 쫓겨나기 이틀 전, 비 오는 처마 밑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던 일... 그 모든 추억들을 어떻게 혼자 감당하라고 훌쩍 떠나버린 것일까?

 

이제 나진아에게 남아있는 그의 흔적이라곤 홍혜성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홍버그'라는 별명 하나와, 그가 휴대폰에 깔아 준 'NearU' 라는 앱 뿐이다. 상대가 주변 1km 이내에 들어와야만 불이 반짝이는, 사실상 거의 무소용한 앱이지만 언젠가 그 불빛이 다시 반짝일 때면 나진아의 가슴은 미칠 듯 쿵쾅거리겠지. 홍혜성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그 때 나진아는 또 어떤 모습일지 나는 도통 짐작할 수가 없다. 만약 노민혁과의 관계가 상당히 진전된 후에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되겠군. 고아원에서 자라난 홍혜성의 정체는 아마도 노민혁의 친동생 노준혁일텐데 그 진실은 또 어떻게 밝혀질 것인지, 이 기막힌 현실에 노씨네 가족들은 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앞으로의 전개 과정은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다.

 

나진아와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노민혁은 그저 아무 생각 없는 일곱 살 어린애일 뿐이었다.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하루종일 '날아라 슈퍼보드'의 노래를 부르거나 '똥침의 기본 자세'를 되뇌이는 철부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진아를 만나면서부터 머릿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이 떠오르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일이 있었다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겁나요. 내가 뭘 잃어버렸는지 몰라서... 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왕싸가지 젊은 사장 노민혁이 가난한 인턴사원 나진아에게 물었다. 꼭 그녀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왠지 그녀라면 진실을 말해 줄 것 같았고, 설령 진실이 아픈 것이라 해도 그녀라면 따뜻이 감싸며 위로해 줄 것 같았다. 그의 천진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했다.

 

 

"대표님은 하버드까지 나오신 똑똑한 분이시고요... 그러면서도 늘 겸손하시고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따뜻하시고요... 무엇보다 저를 회사에 뽑아주신 고마운 분이세요!" 때로는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밉게 구는 사장이었지만, 나진아의 마음 속엔 그를 향한 원망보다 고마움이 훨씬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리 무급 인턴이지만 자신의 스펙으로는 합격할 수 없었던 그 자리에 노민혁이 과감히 뽑아 앉혀 주었으니까, 그래서 어릴 적부터의 꿈을 향해 작은 첫걸음이나마 뗄 수 있었으니까. 비록 자신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직원들 앞에서 "나진아씨를 좀 봐. 예뻐? 매력있어? 아니잖아! 내가 빙구야? 이 바쁜 시간에 나진아씨랑 연애나 하고 있게?" 라고 외쳤던 사장이지만, 그 정도 모욕쯤은 가벼운 모래처럼 씻어내고 잊을 수 있는 대인배 나진아였다. 오히려 그처럼 잘나고 위세등등했던 사장이 불의의 사고로 이렇게 되어버린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은 끝내 철거되었고, 나진아는 엄마 길선자(오영실)와 함께 거리로 나앉는 신세가 되었다. 다단계에 빠진 엄마가 사기를 당하면서, 나진아가 수년간이나 뼈빠지게 일해 모아 둔 월세 보증금을 모두 날렸기 때문이다. 커다란 이삿짐 보따리를 밀고 굴리며 찜질방이나 여관을 찾던 모녀는 끝내 (주)콩콩의 빈 사무실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데... 마침 신장에 초기 종양이 생겼다는 이유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던 전임사장 노수동(노주현)은 지나온 삶을 정리하며 과거를 곱씹던 중 나진아의 부친 나세돌(강남길)과의 추억을 떠올렸고, 그 가족들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놀랍게도 자기 회사의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나진아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노수동의 아내 왕유정(금보라)은 극비에 부쳐진 노민혁의 병세를 이유로 집안에 객식구 들이기를 반대했고, 고민하던 노수동은 당분간 나진아와 길선자 모녀를 자기 집의 차고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회식 자리에서 과음을 한 나진아는 술김에 왕유정의 차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다음 날 아침 왕유정은 뒷좌석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차를 운전하여 노민혁이 있는 병원을 향한다. 10월의 맑은 햇빛이 내리쬐는 병원 마당에서, 두 남녀의 운명적 재회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누구세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노민혁의 태도에 나진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알아채고 그의 눈높이에 맞추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은 환자 면회도 금지, 외부 음식 반입도 금지라며 막았지만, 노민혁이 소원하는 아이스크림을 전해주려고 몰래 엉금엉금 기어서 병실에 잠입(?)할 만큼 나진아는 열정적이었다. 그녀가 병실에 들어서자 일곱 살 노민혁이 "누나!" 하고 외쳤다. "쉿~" 누나가 아니라 '나진아씨'라고 부르라며 고쳐 준 후 나진아는 노민혁의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지난 번에 하지 못했던 정식 인사를 건넨다. "반갑습니다, 정말로요! ... 그리고, 잘 지내셨어요?"

 

그 평범한 인사가 왠지 눈물겹다. 뻔히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잘 지내셨어요, 라니... 어찌 보면 놀리는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할 만큼 따뜻하고 다정하게 들린다. 그것이 진심의 힘일까?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는 노민혁에게, 나진아는 자기 마음 속에 비춰진 좋은 모습들을 가르쳐 주며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노민혁은 먹다 만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고 나진아는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히는데, 어슴프레 눈을 뜬 노민혁의 시야에 나진아의 단정한 얼굴이 꿈결처럼 떠오른다. "나진아씨... 다음에 또 전화해도 될까요?" 아, 그것은 사랑 고백이나 다름 없었건만, 나진아는 그저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어린아이를 대하는 측은함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김병욱의 멜로는 마치 한 편의 시(詩)처럼 함축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표현되지만 여운이 깊고 절절하다. 그 중에도 특별히 아름다웠던 11~13회의 그 몇몇 장면들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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