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진희 (13)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드디어 비정한 엄마 서은하(이보희)를 향한 백야(박하나)의 한맺힌 복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압구정 백야' 29회를 보고 있자니 임성한의 과거 히트작 두 편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데자뷰 현상이 느껴졌다. 우선 '인어 아가씨'의 아리영(장서희)은 외도하느라 가족을 버린 아빠 때문에 엄마와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자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냉혹한 복수를 전개했는데, 현재 백야의 모습은 복수의 상대가 아빠에서 엄마로 바뀌었을 뿐 그 내용면에서 아리영과 별로 다르지 않다. 또한 '하늘이시여'에서는 여주인공 자경(윤정희)이 친엄마인 영선(한혜숙)의 의붓아들 구왕모(이태곤)와 결혼하면서 족보가 황망하게 꼬여버리는데, 현재 백야가 선택한 복수의 방법 역시 친엄마의 의붓아들을 유혹하는 것이라 그 포맷이 대동소이하다. 결..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초중반의 스토리 전개가 괜찮아서 나름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결말은 실망스럽다. 요즘 같아서는 수십 년 전의 그 촌스러웠던 '전설의 고향'을 다시 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너무나 뚜렷해서 소름끼칠 정도였던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그리워진다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들은 '용서' 또는 '화해'라는 단어에 강박증이 걸려 있는 듯하다. 용서나 화해의 메시지에 대중적 공감을 얻으려면 악역을 적당히 나쁜 놈으로 설정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악마같은 놈으로 설정해 놓고서 결국은 피해자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용서하게 만들고, 어쨌든 용서하고 화해하니 모두가 행복해졌다면서 다같이 하하하 웃고 끝나게 만드는 것이다. 참 가소롭기 이를 데 없..
"부모만 자식 때문에 참아야 하는 거 아니야. 자식도 부모 때문에 참아야 하는 거야. 자식이 못났으면 부모가 참아주고 봐주는 것처럼, 부모가 못났으면 자식이 참아주고 봐주면서 그렇게 사는 거야!" 늘상 철없는 할머니라고만 생각했던 김필녀(반효정)의 말이 모처럼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하긴 세상에 자식만도 못한 부모가 어디 한둘이던가?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옛말이 있기는 하되 자식만 덜컥 낳아 놓았다고 저절로 인격수양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리 부모가 되었어도 속 좁은 사람은 여전히 속 좁고 무책임한 사람은 여전히 무책임하다. 자식을 키우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자식을 향한 비뚤어진 집착 때문에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금 나와라 뚝딱'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못난 부모들'의..
제가 이제껏 시청했던 모든 드라마 중 최악의 작품을 꼽는다면 지금부터는 망설임 없이 '청담동 앨리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한참 비뚤어진 주제의식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합리화시킨 대본이 문제였죠. 배우들의 연기는 괜찮았고, 연출도 그만하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가들의 썩 훌륭한 글솜씨는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건데도 어찌나 교활하게 표현하는지, 얼핏 생각하면 그들의 논리가 맞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은 '된장녀의 하소연'이라 하면 적절하겠고, 결말은 '된장녀의 완벽한 환타지 실현'이라 하면 꼭 맞겠네요. 하지만 당최 주제는 뭔지, 작가들이 이 드라마를 쓰면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차승조(박시후)가 정신질환의 일종인 조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초반부터 드러나 있었죠. 심지어 차승조의 가장 친한 친구 허동욱(박광현)의 직업은 정신과 전문의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는 친구이자 주치의로서 언제나 차승조의 정신 상태 변화를 예민하게 주시해 왔습니다. 10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았던 충격... 아버지로부터 위자료를 받아내기 위해 승조를 이용하려 했던 어머니... 어린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여과 없이 털어놓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를 이용하겠다는 뜻이다" 라고 가르쳤던 아버지... 그 후로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며 지내왔던 시간들... 그러다가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 서윤주(소이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녀..
단공주(백옥담)는 그 동안 제가 '신기생뎐'에서 매우 예뻐하던 캐릭터입니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젊은이들의 캐릭터가 건실하게 자리잡혀 갔지만, 돌이켜보면 초반에는 다들 좀 이상했습니다. 단사란(임수향)은 너무 얄미울 만큼 여우같은 기질을 보였고, 금라라(한혜린)는 이기적이고 전형적인 공주였으며, 아다모(성훈)는 오갈데 없는 자뻑왕자였습니다. 그래서 단공주의 시원시원한 기질이 더욱 돋보였지요. 그녀의 생모 지화자(이숙)는 팥쥐엄마보다 더 못된 계모였지만, 단공주는 그런 엄마를 전혀 닮지 않아서 더 예뻤습니다. 의붓언니 단사란이 부용각으로 들어가 기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안된다고 울며불며 매달리다가, 자기 힘으로 말릴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급기야 언니의 손등을 물어뜯으면서까지 결사적으로 만류하던 단공주의 모..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곧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싶을 만큼 한심한 인물이 '신기생뎐'에 등장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단순해서 저지른 일이라고도 볼 수 있기에,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금병원 원장 금어산(한진희)의 아내였다가 지금은 초라한 이혼녀가 되어버린 장주희(이종남)입니다. 장주희는 이십대 초중반의 나이에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금어산과 정략결혼을 했는데, 결혼 전에 이미 난관의 이상으로 임신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비 시가에서도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도 금어산의 부친 금시조(이대로)는 장주희를 기꺼이 맏며느리로 받아들였고, 장주희는 그런 시아버지의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20여년간의 결혼 생..
'신기생뎐'이 아주 많은 문제점을 지닌 드라마임은 확실합니다. 가장 큰 막장요소로 지적받고 있는 것은 역시 '기생'이라는 여주인공의 직업으로 인해, 현실에 존재하는 텐프로들의 삶이나 팁 문화 등이 모두 정당한 것으로 미화될 수 있다는 부분입니다. 혹시라도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를 하나라도 빠뜨릴까봐 신경쓴 것처럼, 여기저기 복잡한 출생의 비밀과 불륜 코드마저 세심하게 채워넣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고전에서나 볼 수 있던 식상한 설정으로, 의붓딸을 구박하는 못된 계모마저 등장합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신기생뎐'은 욕 먹어 마땅한지도 모르겠군요. 이 드라마에 관한 기사만 떴다 하면, 온통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의 지독한 비방으로 댓글란이 채워집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드라마를 왜 빨리 끝내지 않느냐는 식..
저는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자극적이고 막장스럽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재미있고 독특해서 좋더군요.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어낼 때 식상하지 않게, 뻔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임성한의 드라마는 언제나 소재에서부터 보기 드문 독특함을 자랑합니다. 괴상한 인물들도 참 많이 등장하고,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도 많아서 그때마다 욕을 먹곤 하지만, 어쨌든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온갖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 중에 정말 재미있는 것을 찾기란 백사장에서 금조각 찾기인지라, 맑고 고상하지는 못해도 일단 재미있는 임성한의 드라마를 저는 매번 기다리곤 했습니다. 때로 악역을 맡은 인물이 청산유수로 풀어놓는 대사들은 상당히 억지스럽고 궤변스러워서 기를 막히게 하..
'신기생뎐'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온갖 혹평이 난무하며 막장 논란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임성한 작가 특유의 톡 쏘는 재미를 기대하며 좀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홈피를 장식한 문구는 "전통을 지켜나가는 자존심 강한 그녀들" 이지만, 아직까지 저의 인식은 "그래봤자 해어화(解語花)"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야 문화가 그러하니 사정이 달랐다 하겠지만, 이 시대에 자존심 강한 여성이 선택할 직업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소재 자체에 거부감이 든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갈지가 궁금하기에 저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막장 드라마답게(?) 초반부터 이 작품 전체를 휘어싸고 있는 것은 '출생의 비밀'입니다. 그것도 단순하지 않게 몇 겹으로 포개져서 좀처럼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