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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백야' 이보희, 복수극을 살리는 악역의 힘 본문

드라마를 보다

'압구정 백야' 이보희, 복수극을 살리는 악역의 힘

빛무리~ 2014. 11. 21.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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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정한 엄마 서은하(이보희)를 향한 백야(박하나)의 한맺힌 복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압구정 백야' 29회를 보고 있자니 임성한의 과거 히트작 두 편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데자뷰 현상이 느껴졌다. 우선 '인어 아가씨'의 아리영(장서희)은 외도하느라 가족을 버린 아빠 때문에 엄마와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자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냉혹한 복수를 전개했는데, 현재 백야의 모습은 복수의 상대가 아빠에서 엄마로 바뀌었을 뿐 그 내용면에서 아리영과 별로 다르지 않다. 



또한 '하늘이시여'에서는 여주인공 자경(윤정희)이 친엄마인 영선(한혜숙)의 의붓아들 구왕모(이태곤)와 결혼하면서 족보가 황망하게 꼬여버리는데, 현재 백야가 선택한 복수의 방법 역시 친엄마의 의붓아들을 유혹하는 것이라 그 포맷이 대동소이하다. 결국 '압구정 백야'는 '인어 아가씨'와 '하늘이시여'의 내용을 적당히 혼합해서 제작한 임성한의 자가복제 드라마인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쫄깃한 긴장감과 흥미가 느껴지는 이유는 임성한이 작정하고 악역으로 등장시킨 서은하의 캐릭터 때문이다. 


서은하는 '인어 아가씨'의 은진섭(박근형)과도 다르고 '하늘이시여'의 지영선(한혜숙)과는 더욱 다르다. 은진섭은 과거 여배우 심수정과의 불륜에 눈 멀어 조강지처와 어린 딸 아리영을 내치고 외면했지만, 세월이 흘러 그들 모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은진섭과 심수정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은예영(우희진)은 아리영과 피를 나눈 자매였다. 임성한의 작품에서는 그 어떤 인간 관계보다도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간의 우애가 몹시 각별하게 표현되곤 하는데, '인어 아가씨'에서도 예영의 존재로 인해 눈물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결국은 아리영도 피맺힌 원한을 풀고 아버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늘이시여'의 지영선은 미혼 상태에서 홀로 자경을 낳은 후 기억 상실증에 걸려 본의 아니게도 자식을 외면하게 된 경우다. 나중에 영선은 구씨 집안의 후처로 들어가 죽은 전처가 남긴 아들 왕모를 정성스레 키웠고 막내딸 슬아(이수경)도 낳았다. 기억이 되살아난 후 잃어버린 혈육을 찾아 헤매다가 힘들게 살고 있는 자경을 만난 영선은 급기야 친딸과 의붓아들을 결혼시켜야겠다는 발칙한 결심을 하게 된다. 나름대로는 딸 자경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친오빠와 친언니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슬아의 입장에서는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꼬인 족보는 안타깝지만, 아무튼 영선은 어리석은 엄마였을 뿐 악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압구정 백야'의 서은하는 끝내 용서받지 못할 악역이다. 냉혈하고 탐욕스러우며 위선으로 가득찬 이 여인에게는 당최 용서받아야 할 당위성이 한 가지도 없다.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인과 동거하며 백영준(심형탁)과 백선동(백야, 박하나) 남매를 낳은 서은하는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상위 1%의 남자 조장훈(한진희)을 유혹하는데 성공하자, 유부남이었던 조장훈을 단숨에 이혼시키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 와중에 가난한 연인과 어린 두 남매는 가차없이 버려졌다. 


훗날 성장한 아들 백영준을 만났을 때도 서은하는 미안해하거나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착한 영준은 죽은 줄만 알았던 엄마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기뻐했고, 그리웠던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비정한 어미는 자신의 화려한 삶에 구정물이라도 튈까 싶어 애틋한 눈망울의 자식을 단칼에 외면하고 말았다. 영준은 목 멘 소리로 "엄마... 보고 싶었어요!" 고백했지만, 서은하는 매몰차게 잘라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모른 체 살자.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 


일말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엄마의 차가움에 깊은 상처와 충격을 받은 영준은 멍한 상태로 길을 걷다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운명처럼 연결되어 있었던 전화를 통해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백야는 엄마 때문에 오빠가 죽었다는 생각에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다. 오빠가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올케 효경(금단비)을 구박하지 않았으나, 유복자로 태어난 조카를 막무가내로 빼앗아다가 부잣집에 맡겨놓은 것은 역시 백야다운 싸가지였다. 그런데 효경은 정신 들고 나서 처음에만 아기 데려오라며 펄펄 뛰었을 뿐, 심지가 약해선지 줏대가 없어선지 곧바로 백야에게 순순히 설득당하고 말았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엄마의 권리도 소용없는 셈이다.



 

조장훈의 아들 조나단(김민수)과 딸 조지아(황정서)는 서은하를 친엄마인 줄 알고 있는데, 사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하지만 서은하는 자신에게 상위 1%의 삶을 선사해주는 조씨네 식구들이 제 속으로 낳은 자식들보다 훨씬 소중했기 때문에, 정말 친엄마처럼 세심히 챙기며 키웠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 대한 집착도 대단하다. 어느 덧 나단과 지아는 혼기 꽉 찬 성인이 되었고, 서은하는 그들을 쟁쟁한 집안과 혼인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이다. 떡볶이집 딸과 연애하던 나단은 엄마의 등쌀에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이 와중에 서은하의 행복한 집을 노리는 서늘한 시선이 있으니, 바로 버려진 친딸 백야다. 연예인으로 데뷔하게 된 조지아의 운전기사 겸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선 백야는 자연스레 그 집에 침투하는데, 첫번째 먹잇감은 바로 조나단이다. 임성한의 여주인공이 한 남자를 유혹하기로 작정하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남자는 극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머지않아 조나단은 백야의 은근한 유혹에 넘어가 정신 못 차리게 될 것이고, 생전 처음으로 엄마 서은하의 통제에 반항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압구정 백야'의 남주인공은 조나단이 아니라 장화엄(강은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껏 임성한의 여주인공은 항상 최고의 신랑감을 유혹하여 결혼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우월한 조건을 지녔을 뿐 아니라 여주인공과 진심어린 사랑을 나누는 남주인공들이었다. '인어 아가씨'의 아리영은 원래 복수를 목적으로 여동생의 약혼자 이주왕(김성민)을 유혹했지만 나중에는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 외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여자 쪽에서 먼저 흑심(?)을 품고 은근히 대쉬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그녀들에게 있어 남자를 유혹하는 것은 사랑과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백야의 경우는 조나단을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 의미는 복수에 제한될 뿐, 사랑이나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MBC의 '압구정 백야' 홈페이지 대문에는 분명 박하나와 강은탁을 주인공으로 한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다. 비록 지금은 장화엄의 역할이 미미하지만 "우리들의 특별한 만남, 운명이라 믿습니다" 라는 홈페이지의 문구처럼 결국 백야와 장화엄은 사랑에 빠질 것이고, 백야는 사랑과 복수의 기로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작품의 주인공들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어려워진다. 


장화엄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백야가 복수를 중간에 멈추면, 그것은 임성한 드라마의 정체성을 깨는 일이니 불가능하다. 백야는 장화엄을 사랑하면서도 어쨌든 조나단과 끝까지 가야 한다. 재벌가와 사돈을 맺으려는 서은하의 계획을 깨뜨리고, 가난한 친딸이 친엄마의 며느리가 되는 무참하고도 패륜적인 결말을 끌어내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임성한의 복수답다. 용서나 화해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전작에서와 달리 죄 지은 엄마는 뉘우치지 않고 있으며, 그 슬하의 자녀들 역시 백야와는 피가 안 섞인 남남으로서 애틋한 형제의 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예상컨대 가장 불쌍해질 캐릭터는 바로 조나단이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지만, 결국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 없었음을 깨닫게 될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가 친엄마라고 믿어왔던 서은하의 친딸로서 복수를 위해 접근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될테니, 그 정도 충격이라면 어지간한 멘탈로서는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복수를 위해 사랑을 외면해야 할 백야와, 그런 애인을 속수무책 지켜보아야 할 장화엄도 가엾긴 하지만. 



나는 해피엔딩에 집착하는 시청자가 아니므로 마음 불편할 이유는 없다. 이제부터 백야의 찰진 복수극을 신나게 감상할 생각이다. 조지아의 매니저로서 집을 방문한 백야는 조나단이 밤 늦게 귀가하자마자 곧바로 집에 가겠다며 일어섰다. 조지아는 밴이 나오기 전까지 당분간 오빠의 차를 이용하기로 한 터라, 조나단은 차의 운전법을 설명해 주기 위해 백야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조나단은 자연스레 백야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게 되고, 백야가 중간에 내려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겠다고 하자 기꺼이 자기가 사 주겠다고 나선다. 마치 유혹당할 준비를 갖추고 기다렸던 것처럼, 삽시간에 빠져드는 모습이 뭔가 아찔한 쾌감을 선사했다. 


복수극의 진정한 쾌감은 결말보다 진행 과정에서 만끽할 수 있는 법이다. 특히 악역의 존재감이 클수록 복수극의 재미는 더욱 쫄깃해진다. 내가 보기에 서은하는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포스를 지닌 악역이다. 과거의 죄악과 최근 아들 영준을 외면한 잘못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의붓 자식들의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 드는 과한 욕망 역시 생각할수록 소름끼친다. 그러니 본격적 복수를 시작한 '압구정 백야'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악역 서은하의 특별한 존재감 때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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