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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월요일 방송된 '선덕여왕' 57회에서 비담과 선덕여왕의 멜로가 예상치 못한 급진전을 보이면서 수많은 시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당혹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제 올렸던 '비담에게 보내는 선덕여왕의 편지' 에서 이미 저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듯이, 비담을 향한 여왕의 마음은 결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껏 덕만은 한 번도 비담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노오란 들꽃을 건네며 수줍게 웃는 비담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보이며 "너는 나를 여자로 대해 주는구나" 하고 기뻐하기도 했고, 미실의 죽음 후 방황하는 비담의 뒤를 쫓아가 어미 잃은 새를 감싸듯이 그를 포근히 안아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
나는 왕이다. 비담, 너는 모른다. 너는 왕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지금도 어미 잃은 송아지처럼 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어찌 나를 사랑했단 말이냐. 한 번도 너를 바라본 적 없는 나를, 너는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더란 말이냐. 평범한 여인에게는 온 세상일 수도 있었을 너의 가슴이, 왕인 나에게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을, 너는 하필 그 가슴을 나에게만 열었더란 말이냐. 왕의 길을 가려고 유신의 손을 뿌리친 순간부터 나는 사람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었다. 유신도, 춘추도, 너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다. 왕이란 그런 것이다. 정치라는 냉혹한 장기판에서, 이용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 또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이유가 있..
유신랑(庾信郞), 당신은 내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나요? 나는 카탄 아저씨를 따라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나를 구하려고 연기를 들이마셔서 얻게 된 우리 엄마 기침병도 고쳐주고 말이예요.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저 멀리 서역 어디에선가 당신을 만났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나는 두려움도 눈물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모두가 내게는 즐거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예요. 나의 앞날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요. 나는 그렇게 철모르고 용감한..
'선덕여왕' 43회에서 보여준 유승호의 연기력은 그의 인기에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는 논란을 충분히 잠재울만 했습니다. 물론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누구나 '국민남동생' 이며 '누나들의 로망' 이 될수야 없겠지만, 그의 폭발적인 인기가 다만 귀엽고도 훤칠한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은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연기자로서 유승호가 가진 커다란 장점 중 하나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어딘가 비극적 분위기를 풍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슬픈 연기를 잘하는 아역들은 많습니다만 보통은 단지 슬픈 장면을 연기할 때만 눈물을 자아낼 뿐,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심지어는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역은 별로 없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의 특성은 슬픔보다는 밝음과 해맑음, 쾌활함의 ..
춘추(春秋)야, 내 아들 춘추야, 머나먼 길에 고단한 몸으로 돌아온 너를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 줄 수만 있었다면 구천(九泉)에서도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았으련만, 이 못난 어미는 너에게 한 조각 힘도 위로도 주지 못한 채 이처럼 차가운 땅 속에 누워 있구나. 가엾은 내 아들 춘추야, 부디 굳건하게 너를 지켜야 한다. 네 어미는 언제나 겉으로는 강한 척하려 애썼으나 속은 그렇지를 못했어. 나는 너무 약했고 매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떨고 있었다. 세 번째 남동생을 또 잃으신 어머니 마야황후의 애끓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황후전 밖에 서 있었을 때, 눈앞에 독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었단다. 미실은 몸을 낮추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귀에 속삭였지. "너 때문이다..." 춘..
어머니, 소자 춘추(春秋)이옵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너무 늦게 돌아와 마지막 싸늘한 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춘추이옵니다. 겨우 말을 배울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리워만 하다가 때로는 원망도 하였습니다. 저를 떠나 보내시던 그 애틋한 모습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열 밤, 스무 밤보다도 더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며 울먹이시는 어머니 앞에서, 철없는 저는 놀러가는 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었더랬지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비록 저와의 헤어짐을 슬퍼하며 울고 계셨지만, 얼마나 젊고 고우셨는지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원망합니다. 이모님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는 여전히 고..
사실 지난번에 "문노가 제자 비담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으니, 오늘은 "비담이 스승 문노께 드리는 편지"를 작성하여, 아버지같은 스승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비담의 절절한 심경을 담아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판에 염종을 따라가는 비담의 약간 뒤집어진 눈빛을 보니 도대체 이 녀석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비담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비담은 내력이 파란만장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라는 점만은 확실하지만, 아직도 선악의 경계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녀석이라 오직 다이내믹할 뿐 종잡을 수가 없어요. 캐릭터와의 감정 일치에 실패한 관계로, '선덕여왕' 37회 리뷰는 편지 형식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리뷰로 진행됩니다. 편지 시리즈를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
춘추야... 너는 알잖아... 알면서 그러는 거잖아. 그 어린 나이에 너는 혼자서 외국 생활을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벅찼을텐데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텐데 네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 춘추야... 네 엄마는 어쩔 수 없었어. 엄마를 원망하면 안돼. 알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너를 걱정했던 엄마야. 너의 엄마 천명공주도... 너 못지 않게 외롭고 슬펐어. 춘추야... 알지? 네 속이 지금 어떨지...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거든. 그래도 다행이야. 춘추... 너는 정말 똑똑한 아이이고 어려서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그 결과로 네가 누군지를 알고 있잖아. 얼마든지 꿈꿀 수 있고, 얼마든지 당당하잖아. 그게 얼마나 큰 특혜인지 너는 아직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