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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그래도 고마웠어, 칠봉아!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4' 그래도 고마웠어, 칠봉아!

빛무리~ 2013. 12. 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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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의 취향 차이겠지만, 솔직히 나는 한 번도 쓰레기(정우)에게서 '남자'의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쓰레기는 언제나 '오빠' 중에서도 가장 믿음직하고 든든하고 좋은 '오빠'일 뿐이었다. 그런데 칠봉이(유연석)에게서는 언제나 '설렘'이 느껴졌다. 사실 원래의 내 성격대로라면 일방적인 사랑 고백 이후 일방적으로 키스를 해버리는 식의 제멋대로인 행동은 몹시 싫다고 느껴져야 마땅했다. 더구나 그 때 성나정(고아라)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입술을 마구 들이밀던 스무 살 칠봉이의 행동은 심히 무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칠봉이가 싫지 않았다. 나정이는 안 그랬지만, 나였다면 그 키스 한 방으로 마음을 바꿔버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칠봉이는 '남자'로서 매력적이었다.

 

종영을 2회 앞둔 상황에서 '응답하라 1994'의 떡밥 투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18~19회를 보면 성나정의 남편이 무조건 칠봉이일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나는 젇답이 쓰레기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무 반전 없이 순탄하게 결혼까지 달려가면 재미 없으니까, 막판에 대형 떡밥 하나 정도는 던져주는 게 시청자를 향한 드라마 제작진의 예의(?)일 테니까. 어찌 보면 칠봉이가 참 불쌍하기도 하다. 그 싱싱한 20대 초반의 황금기를 오직 성나정만, 자기한테 눈길 한 번 주지도 않는 그녀만을 해바라기하느라 목이 돌아갈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멋지고 좋은 남자에게 걸맞는 짝이 없을리가 없지. 칠봉이는 나정이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게다. 13년 후, 쓰레기와 나정이의 집들이에 가서 오래 전에 자기가 선물했던 야구공을 집어들며 감회에 잠겨도, 한치의 쓰라림이나 서러움이 없을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게다.

 

 

그래도 나는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그 해 겨울의 설렘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지구 멸망이 오든 안 오든, 20세기를 마무리하는 그 시각에는 무조건 하숙집에 다 같이 모여서 술 한 잔을 나누기로 했던, 그 약속을 잊지 않은 사람은 두 명이 더 있었지만 칼 같이 지킨 사람은 오직 칠봉이뿐이었다. 빙그레(바로)는 기억했지만 별로 지킬 뜻이 없었고, 삼천포(김성균)와 조윤진(도희)은 빙그레에게서 듣고서야 기억했으며, 해태(손호준)는 첫사랑 애정이(윤서)를 다시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른 데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19회 말에서야 비로소 드러났지만 쓰레기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얄궂은 교수님의 호출과 설상가상 겹치는 교통체증과 접촉사고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나정이 혼자서 준비해 간 맥주, 소주, 막걸리를 혼자 다 마셔버릴 뻔했는데, 다행히도 칠봉이가 나타났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위로 운동선수답지 않게 햐얗고 말끔한 그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얼마만의 귀국인데, 메이저리그에서 명성을 떨치는 국민영웅 칠봉이가, 공항을 나서기 무섭게 밀물처럼 몰려드는 팬들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에 얼굴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인 스타 중의 스타 칠봉이가, 한국 땅을 밟자마자 처음으로 생각하고 발걸음을 향한 곳은 바로 신촌하숙이었다. 3년 전의 약속... 그리운 친구들... 그리고, 나정이... 사랑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겠다 생각하니 그래도 마음이 좀 놓였다. 꿈에 그리던 그녀와의 재회... 더욱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단 둘만의 재회... 일 년을, 아니 한 세기를 보내며 단 둘이서 나누던 알싸한 술 한 잔, 흰 눈 흩날리던 그 날의 따끈한 라면 한 젓가락... 비록 헤어지더라도 그 때의 기억만은 정말 예쁘고 아름답게 남을 것 같았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잔인하게도 칠봉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15일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할 시간도, 사랑을 표현할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칠봉이는 용감하고, 적극적이고, 능청스러웠다. 이미 운전면허를 갖고 있으면서, 급할 때는 자유자재로 차선을 바꾸며 다른 차들을 추월해서 달릴 만큼 베스트 드라이버면서, 아직 면허가 없는 양 나정이를 속인 이유는 오직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호주에서 2년간의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나정이는 지방에 내려가서 시험을 보면 속성으로 면허를 딸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장 실행에 옮기는데, 그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을까? 칠봉이는 자기도 면허시험을 본답시고 나정이와 함께 무려 세 번이나 지방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서울에서는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 대구광역시의 한 구석에 위치한 면허시험장을 물어물어 찾아가 속성으로 운전면허를 땄던 경험이 있다.

 

 

나정이가 학과 시험, 기능 시험, 도로주행 시험을 모두 한 번에 착착 붙는 동안, 칠봉이는 학과에만 연거푸 3차례나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그녀를 쫓아다녔다. 바보 멍청이라고 나정이가 구박을 해도 마냥 좋았다. "그 머리로 야구는 우찌 하노?" 나정이가 구박하면 뻘쭘하게 웃으면서 "그래도 나 야구는 잘해!" 라고 소심하게 항의했다. 나정이는 친구가 시험에 떨어져서 안타깝고 속타는데. 칠봉이는 그 옆에서 진짜 바보처럼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나정이 아빠 성동일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급히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정이 엄마 이일화는 먼 곳에 발이 묶여서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을 위해서는 보호자 사인이 필요한데 좀처럼 택시는 잡히지 않고, 초보운전자 성나정은 멘붕 상태라서 핸들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 때 운명처럼 곁에 있던 칠봉이가 말했다. "키 줘봐, 얼른!" 그리고 스릴 넘치는 한밤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칠봉이 덕분에 성나정은 늦지 않게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할 수 있었고, 성동일의 수술은 무사히 치러졌다. 안심해도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잠시 숨을 돌리던 나정은, 문득 칠봉이 괘씸한 놈이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의 지갑을 빼앗아 면허증을 확인한다. '미안... 내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며 펄펄 뛰는 나정에게 칠봉이가 말했다. "그럼 어떡하냐? 난 보름 후면 다시 미국에 가야 되고, 시간은 없는데... 그래, 일부러 그랬어. 이번에 놓치면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거든. 혹시 기억하니? 몇 년 후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 때 네 곁에 아무도 없으면 우리 연애햐자고 했던 말... 나정아, 난... 네가 너무 좋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고, 지금도 좋아!" 아, 그 머나먼 곳에서 피부색 다른 사람들과 힘겨운 나날을 버텨내며 오랫동안 고이 간직해 온 칠봉이의 첫사랑은 풋풋함과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사랑의 고백은 너무 아팠다. 배경 음악으로 깔리던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처럼.

 

성동일이 입원한 병원은 현재 쓰레기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이었다. 성동일이 사고를 당하고 실려왔을 때, 쓰레기는 교수님의 수술에 동참하느라 연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동료로부터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달려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그 앞에는 나정이와 칠봉이가 서 있었다. 운명은 그렇게 잔인하고, 지독하고, 힘이 셌다. 2년 전, 청첩장까지 돌린 상황에서 나정이가 취직이 되고 하필 해외 근무로 발령이 나서 결혼을 미루게 되었던 것도, 서로의 바쁜 생활에 치이다 보니 연락이 뜸해지고 어정쩡하게 헤어져 버렸던 것도, 20세기의 마지막 날 접촉사고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도 모두 잔인한 운명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세 사람이 만나는 그 순간이 훨씬 더 잔인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희망이나 주지 말 것을, 하필 이처럼 설레고 행복한 순간에 딱 마주치다니!

 

 

사실 나정이와 쓰레기의 이별은 누가 봐도 억지였다. 수십 년을 남매처럼 지내면서 가족처럼 깊은 정을 쌓았던 그들이, 쓰레기의 지방 근무 때문에 몇 년씩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도 서로의 굳건한 마음을 믿으며, 변하기는 커녕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그 특별한 연인이, 고작 2년 동안 얼굴 못 본다고 흐지부지 헤어진다는 게 말이 되나? 설령 연애감정이 식었다 해도 오빠 동생으로는 자연스럽게 만나야 정상인 관계였다. 그런데 별 이유도 없이 헤어지고, 원수진 것도 아닌데 가족들과 주변인들마저 서먹서먹해질 만큼 두 사람은 아주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성동일이 쓰레기를 만나서 아들처럼 여겼던 너를 잃을까봐 두려웠다고 털어놓을 때도, 그 앞에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쓰레기가 눈물을 흘릴 때도 별로 울컥하거나 공감이 되지 않은 것은 이별의 당위성이 없어서였다. '그냥 다시 만나면 되잖아, 왜들 오버하고 저래?' 이런 생각이 들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절묘한 우연과 기막힌 타이밍과 정교한 반전으로 그들은 다시 만났다. 이것은 잔혹한 운명의 장난일 뿐, 나정이의 선택은 쓰레기일 것이다. 나 같은 시청자가 보기에는 칠봉이의 매력이 철철 흘러 넘치지만, 정작 성나정은 한 번도 칠봉이에게 눈길이나 마음을 준 적이 없다. 이제 와서 그토록 사랑한 쓰레기 오빠의 애틋한 눈빛을 뒤로 하고 칠봉이와 결혼한다는 것은 당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예고편을 보니 칠봉이의 어깨 부상이 악화되어 선수 생활을 접게 되는 것 같던데, 우리 칠봉이 가여워서 어쩌나? 물론 그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겠지만, 일과 사랑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고통받던 청춘의 기억은 다시 돌이켜 봐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왜 너만 보면 웃음이 나지?" 하고 처음 고백하던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칠봉이 때문에 설렜다. 나정이와 쓰레기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쓰레기에게 야구공을 건네주면서 언젠가 그녀를 빼앗아 오겠다는 식으로 말하던 모습은 아주 실망스럽고 찌질햇지만, 그건 떡밥 투척을 위한 제작진의 무리수였을 뿐 칠봉이가 원래 그런 녀석은 아니었다. 나정이와 함께 갔던 영화관에서 우연히 스포츠신문 기자와 마주쳤을 때, 아직은 자기 혼자 좋아하는 것일 뿐 서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 제발 기사는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칠봉이는 멋진 남자였다. 일방적으로 키스를 퍼붓던 스무 살의 열정을 뒤로 하고, 이제는 상대를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속 깊은 어른이 된 것이다. 비록 사랑의 승리자는 못 될 지언정, 그래도 너 때문에 행복했다. 고마웠어, 칠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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