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고경표 (17)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김병욱 시트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웃음의 미학과 슬픔의 미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뿜어내는 중독적 카타르시스라 할 것이다. 등장인물 각각의 캐릭터가 아주 극적이면서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시청자의 강한 몰입을 이끌어 낸다는 특징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외에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미스테리 요소를 집어넣어 추리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인데, 김병욱의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단 미스테리가 삽입되면 극의 전개는 훨씬 생동감 있고 흥미로워진다. 대표적으로는 '하이킥' 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던 '거침없이 하이킥'을 들 수 있겠다. 풍파 고등학교의 히로인 강유미(박민영)와 그 가족들의 미스테리한 정체는 무려 167회에 달하는 긴 시트콤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끝없는 이..
내가 김병욱 시트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김병욱이 그려내는 것만큼 미칠 듯 설레면서도 저절로 가슴이 시려오는 멜로 장면들을 본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잔인하다 싶을 만큼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는 작품들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달랠 수 있다. '감자별 2013QR3'은 초반부터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더니 불과 13회만에 기쁨과 슬픔, 설렘과 떨림, 격정과 원망, 애틋함과 그리움 등의 감정을 모조리 담아낸 러브라인이 시청자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도대체 김병욱은 얼마나 공들여서 이번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직 초반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기존의 다른 작품들을 훨씬 뛰어넘는 완성도..
운명의 그 날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던 소행성 2013QR3은 다시 경로를 바꾸어 지구의 위성이 되어 버렸고, 밤하늘에는 거짓말처럼 두 개의 달이 떠올랐다. 지구의 종말과 죽음을 예감하며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저마다 치열한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되고, 그 색다른 내면적 체험들은 더 이상 지구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일이 없으리라 여기며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한 사람들 중 몇몇은 상대방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그 날부터 꿈 같은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8살난 규호와 혜림이 커플도 있었다. 사랑하고 뽀뽀하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규호 엄마 노보영(최송현)은 타이르지만, 염세적 종말론자(?)인 규호는 어른이 되기 전..
글쎄, 잘 모르겠다. 그저 사람마다 타고난 운명과 팔자가 제각각이라는 말 밖엔 할 수가 없다. 분명 머리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제 17세, 고등학교 1학년이라면 분명히 미성년자다. 만으로 15세~16세일 것이다. 나는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미성년자들이 성인 컨셉으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것보다 제 나이에 걸맞는 체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승호가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로 8세 연상의 서우와 부부 연기를 선보이며 치정 멜로에 출연할 때도 나는 심한 거부감을 느꼈고, 갓 중학교에 입학한 14세 소녀 김유정이 성인 컨셉의 섹시 화보를 찍었을 때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섹시 댄스를 추는 아이돌 걸그룹을 바라볼 ..
오랜 꿈이었던 완구회사 '콩콩'에 무급 인턴으로 취직한 나진아(하연수)는 첫 출근을 하던 날 아침부터 불길한 기운에 휩싸인다. 엄마한테서 옮은 감기몸살 때문에 컨디션도 최악이었고, 던져주는 음식을 입으로 받아먹는 데는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던 '물개' 나진아가 놀랍게도 인절미를 받아먹지 못하고 떨어뜨렸던 것이다. 결코 순탄치 않을 그녀의 회사 생활을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젊은 사장 노민혁(고경표)은 신입사원들에게 강연을 한답시고 줄줄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다. "내가 하버드에 있을 때 말이야. 두 번이나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된 적이 있었지. 하지만 두 번 다 내가 거절했어? 왜냐고? 내가 내 점수에 만족을 못했거든.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점수를 가지고 장학금을 받는다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어. 자존심은..
'감자별' 2회까지 시청한 느낌이 매우 좋다. 개인적으로는 '하이킥' 시리즈나 그 이전의 명작들보다 출발이 훨씬 좋은 듯하다. 각각의 캐릭터 구축이 확실함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내가 김병욱표 시트콤에서 유난히 즐기는 그 뭐랄까, 아련하고 애틋한 느낌이 초반부터 여실히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스텐레스 김은 청춘남녀의 러브라인을 복잡하고 아리송하게 꼬아서 중반을 넘기도록 예측 불가하게 만들곤 하는데, 이번에는 어찌 된 셈인지 단 2회만에 두 남녀의 러브라인이 아주 또렷한 선을 그리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물론 이대로 확정이라고 볼 수야 없겠지만, 어쨌든 김병욱의 다른 작품에서는 거의 본 적 없는 독특한 전개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 그런데 미처 감정이 무르익을 새도 없이 초고속으로 진행..
드디어 김병욱 월드가 다시 열렸다. 그 이름도 특별한 '감자별 2013QR3'! ... 요즘 세상에 케이블 TV를 신청하지 않은 특별한 집이라 본방사수를 할 수 없다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지만, '하이킥3' 이후로 2년만에 다시 만나는 김병욱 월드는 어쨌거나 반갑기 그지 없다. 무엇 때문일까?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스텐레스 김의 세상에 이처럼 빠져들게 된 것은, 포복절도할 웃음 속에 스며든 눈물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최대한 비극적 요소를 억제하고 많은 웃음을 주겠노라 했지만, 나는 그래도 김병욱이 그려내는 진한 눈물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1회를 시청한 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진아(하연수)와 같은 인물을 여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상, 결코 눈물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